똑같은 물건을 사는데 어제보다 오늘 돈이 더 든다는 것은 속이 쓰린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개별 소비자들은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만큼 비정한 존재는 아니어서
(당연하지! 우린 이념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공정무역 상품도 사고 자선단체 기부도 하고 자원봉사도 하고 빅이슈도 사고...
행동경제학이나 심리학 책의 실험결과를 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이상으로 공정성을
추구하는 그런 존재들이다. 가끔 비정한 일들도 벌어지지만...암튼 그렇다.
도서정가제도 마찬가지. 당장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눈물을 팔아 덕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만약 현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경로를
접근하기 복잡하게 만들었거나 진실을 널리 알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비자를 귀찮게 하면 만사가 꽝이다.)
사실 처음엔 인터넷 서점의 할인 판매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걸 오히려 이상하게 생갔했었다.
왜냐하면 인터넷 상거래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창고비용, 매장비용을 줄이고 소비자와 바로 연결될 뿐 아니라 롱테일경제라고 부르는 - 소수 베스트셀러가 매출을 주도하는게 아니라 다수의 이름없는(?) 책들이 꾸준하게 팔리는 - 인터넷매장의 장점이 저렴한 가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기호 소장의 글을 보면 인터넷 서점이 대량구매처의 힘을 악용해 할인을 했을 뿐이라고 하는데다가 인터넷 서점의 효율성 운운하는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는 내 생각에 오류가 있는게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기는 하다.
도서정가제 관련하여 생각을 정리하기가 힘들었고, 아직도 힘들다. 그 이유를 몇가지로 정리해 보면
우선, 책과 출판사가 하나로 묶이기에는 너무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다.
고작 수명이 몇 달에 불과한 수험서나 문제집, 주간이나 월간 잡지, 스티커북같은
1회용 아동서적, 개Dog발로 번역한 책, 50%로 할인하기 위해 태어난 책들과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와 '논어'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위인전과 김대중 자서전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돌베개와 시공사와 더클래식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가제 주장 속에 배신감을 느낄만한 내용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주장이
섞여있어 설득이 되지를 않는다.
이번에 어렴풋이 알았다가 확실해진 대표적인 사실이 책의 가격에 거품이 있다는 것.
출판계의 도서정가제 찬성 주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얘기가 있는데 할인을 고려해서 정가를 부풀려 판매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처구니 없더라.
오프서점에서 정가주고 산 책들은 다 뭐란 말인가? 오프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사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고백이다. 거기다가 온라인 서점을 마치 악의 축처럼 몰고 있는데 온라인 서점의 공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온라인 서점이 아니었다면 나의 독서 이력은 3...5...7...분의 1 정도로 줄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온라인 서점이 있어서 도서 구매가 몇 배는 늘었다는 말이다.
화두가 되어 있는 알라딘에 대한 출고정지 문제도 있다.
알라딘에서 주로 책을 구매하는 사람으로서 기분이 꽤 거시기 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고, 출고정지의 효과만 보려고 한다.
출판인들은 온라인 서점의 과점화로 인해 출판사에 대한 횡포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3위권(알고보니 4위. 인터파크 3위. 허걱!)에 있는 온라인 서점에 대한 출고정지는 오히려 나머지 1~2위 서점의 과점,
나아가 독점 상황을 강화하는 조치가 된다. 출고정지를 푼다해도 이미 이번 일로 어느정도든 과점상태가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이는 방침이 아닌지....
뭐, 정가제만 되면 상관없나?
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이뿐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자꾸 든다. 최종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은 저마다 고유하다.
따라서 책은 다른 책과 경쟁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만으로 경쟁한다.
굳이 경쟁을 한다고 한다면 유통업자간의 경쟁이지 책과의 경쟁이 아니다.
만약 '신화의 힘'이라는 책을 읽는다면 교보문고의 그 책이나 알라딘의 그 책이나
예스24의 그 책이나 모두 동일하다.
다른 (비슷한 소재의) 책들이 경쟁상대가 아닐까 싶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의 인생에 할당된 제한된 시간의 일부를 '신화의 힘'에 할애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슷한 다른 책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TV나 카톡이나 영화나 강남스타일이나 야근이나 회식 때문일 것이다.
도서정가제 이후의 예상되는 상황도 그리 명확하지 않다. 아니, 내 생각에는 좀 암울하다.
일단 도서 구입비용은 올라간다. 가끔 반값에 횡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생필품이 아니므로 불경기인 요즘 특히나 더 민감하게 판매량이 반응할 것 같다.
온라인 서점의 사정이 좋아질지 나빠질지도 모르겠고...
출판사들의 사정은 판매량이 떨어지는데도 조금이나마 나아질려나?
(할인이 비정상적이었다면 할인에 기댄 판매량도 비정상적인 것이다.)
다행히 수익이 좋아지면 망하는 출판사가 줄게되고 자연스레 양서를 내는 곳이 많이 유지되긴
하겠지만 팔리는 책이 줄어든다면 존재 의미가.....
어찌되었든 이번 일은 독서인구와 독서량을 늘리는것과는 별로 상관없어 보인다.
줄이는데는 기여할지는 모르겠다.
이번 일이 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첫걸음이 될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런 분석 통해서 진행되는건 아닌걸로 보인다.
암튼, 책을 찾는 사람이 줄어드는데 마진만 확보되면 뭐할지....
(유치원때부터 입시준비하고 취업준비에 엄청난 스펙이 필요하고 직장에서는 무한 경쟁하고 퇴직해서는 노후가 불안한데다가 주변엔 온통 스마트 기기로 둘러싸여 있으니 책을 읽을 여유가,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4대강 사업할 돈으로 도서관 사업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건설족들의 배도 부르게 하면서
도서관도 늘고, 도서관이 늘어나니 사서 등 취업자도 늘고 공공도서관의 도서 구매량도
늘고 사람들이 책과 문화를 즐길 공간이 늘어서 좋고.
권력은 대중이 멍청한걸 더 좋아하니까 그럴리 없었겠지만서도...
어제 저 멀리 이상한 색깔의 부천버스가 지나가서 궁금했는데 갤러리 버스라고 한다는걸
지금 알았다. 만화 읽는 인구가 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