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이 찾아지지 않는다고 몸을 이리저리 굴리고 부풀리고 꺼뜨리는 닥터의 난처한 표정이 흥미롭다. 숨겨둔 살집이 있으신가 봐요, 건네는 소리는 의례적으로 다정하지만 나는 슬프다. 장작처럼 자꾸 건조해져 가는 것은 몸도 마찬가지라고 새 옷도 몇 벌 사 본 여름이었는데 지난해보다 5키로나 늘어난 것이다. 아, 그놈의 비장.  

읽고 있는 책들 중 어딘가에서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무엇인지 가려내질 못한다. 늘어난 체중만큼 뇌를 잠식한 비계 탓인 것이다. 가령, 잠식은 누에가 뽕잎을 차근차근 갉아 먹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라거나 머리가 쭈뼛 서는 전율은 밤송이의 무시무시한 가시를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다른 장기에 가려서 잘 찾아지지 않는 지라가 비장이며, 비장의 무기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문장은 다시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이 아닌가봐. 닥터가 찾지 못하는 비장 탓에 비만녀가 된 듯 해 슬프고, 읽은 책을 거푸 읽은 여러모로 쓸쓸한 저녁이다. 

산란한 꿈에 밤새 잠을 설치고 몇 달을 미뤄 산 [나무사전]을 새벽빛에 읽는다. 나무를 보며 살고자 했던 유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나마의 궁금을 책으로 메운다. 선물하겠다던 마음을 사양하며 이 책은 내게 ‘김씨 표류기’의 자장면 같은 책이에요, 하고 웃었던 이른 봄의 일을 즐거이 떠올린다. 누가 대신 해줘서는 안 되는 궁극의 것이었다면 그도 좀 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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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7-1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장의 무기가 그런 거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아.

rainer 2010-07-2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장을 찾았는지 말해주지 않았어요 닥터는.
알라딘이 달라졌군요. ^_^

시월의 아침 2010-07-2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가 대신 해줘서는 안 되는 궁극의 것" 이런 당신 생각이 멋진데요!

rainer 2010-08-03 13:19   좋아요 0 | URL
멋지다는 말은 멋진거군요. 좋은 칭찬 감사해요 ^^

2010-07-31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은 아이가 시험 보는 날 아침에 달콤한 음식을 찾는 건 그 아이의 징크스다.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며 프리트 된 기/가를 돌아다니며 읽는다. 한 방울 누나 방에 떨어지고 누나는 꽥 소릴 지른다. 아이는 쓸쓸하게 키친 타올을 한 장 뽑아다 바닥을 닦는다. 아빠는 아침부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고 근엄하게 한마디. 나는 아이를 그냥 두라고 말하고 심술이 난 누나는 엄마는 동생에게만 참 관대하군! 독설을 날린다. 허둥대고 뭐든 챙겨줘야 하는 나보다 더 키가 자란 아이들이 항상 예쁘진 않다. 아이들이 나간 집안. 나는 아빠에게 아이의 징크스를 설명해주려고 설거지 하는 내내 단어를 고른다. 그게 또 어렵다. 아이에 대해 모른다는 건 그나 나 모두에게 무척 쓸쓸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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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빳빳하게 다려진 흰 광목 베개에 양 팔을 엇갈려 괴고 오래된 소설들을 매일 두 어장 씩 읽었다. 건조하고 마른 손가락에 담배를 끼워 불을 붙이고 엎드린 채로 깜박 잠이 들면 타들어간 재가 바닥에 떨어져 노란 장판에 동그란 새 무늬가 생겼다. 그는 그렇게 열 몇 해를 보내다가 그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죽었다. 가여운 그는 살고 싶었던 대로 살던 시절을 잊지 못해 때때로 오래 앓았다.  


며칠 전 읽은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이 문득 떠올랐다.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해서 욕망하는 것이 많았다던가. 크게 욕망하는 것도 없는 나는 살고자하는 대로 살지 못 하는 것이 쓸쓸하고 쓸쓸했다. 그 밤 음영이 분명한 낯선 수직의 방안은 가고자 하는 삶과는 다름이어서 깊은 통증이 왔다. 사랑으로 견뎌지는 것의 한계가 문득 궁금했다. 설터의 책은 내가 읽은 기억과는 달랐다.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다른 것들을 욕망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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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6-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으로 견뎌지는 것의 한계 - 어이쿠, 뜨끔합니다.

rainer 2010-06-2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보니 되게 나쁜말을 써 놓은 것 같다는 생각 듭니다. ^^
 

 
어제는 먼 길에서 돌아온 당신과 늦은 술자리를 했어요. BBB 치킨 집 배달 가방 안에 남아공 월드컵 일정표가 들어있더군요. 그게 재밌어서 모처럼 싱겁게 웃었지요. 맥주와 전쟁 같은 축구를 봤어요. 잠이 오지 않는 평범한 밤이었습니다. 과도한 운동 후였고 어쩐지 내 목소리는 열흘 전 보다 높아져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면은 휘발성이라서 취기에 약합니다. 현재의 당신은 마흔일곱이고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나이지만 그것은 당장의 기분일 뿐이라고 잠깐 생각하다 잠든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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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심의 눈을 떠 찻물을 올리면 곁에 자던 아이가  일어나 커피콩을 간다. 발소리도 내지 않는 고양이 같은 녀석. 나는 허리를 굽혀 새 CD를 고르다가 상심이 아이의 손끝에서 드르륵 갈려나가는 걸 느낀다. 고마워. 아이는 멋쩍은 듯, 이거 손으로 안할 수 없어요? 전동 밀 말이니? 응. 마주보고 소리 없이 웃는 우리는 사실 핸드밀이 좋다. 낡아 치직거리는 오래된 오디오에서 나오는 풍부한 소리도 좋으며. 전동밀이 좋은 건 핸드밀의 불편함을 알아서이고 오래된 오디오가 좋은 건 간편한 muji플레이어가 주는 가벼운 소리를 듣고 지내기 때문은 아닐지. 시만 보아 마음이 가을인데, 아닐 땐 가을이고 싶더니 또 가을이니 시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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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6-0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아이가 참.
자꾸만 오래된 것들이 좋아지네요, 저도.

rainer 2010-06-1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