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하던 아비가 술에 취해 아기 고양이를 걷어차 죽였다. 어미는 불쌍한 아기고양이를 봄 볕 잘 드는 곳에 묻었다. 집 구렁이가 헛간의 황토벽을 타고 오르던 수상한 시기였다. 아비는 그 집에서 몇 년을 더 살다 죽었다. 헛간 짚더미에 몰래 숨어들어 예닐곱씩 새끼를 낳던 고양이들이 종적을 감췄고 나는 그 뒤로 고양이를 피해 다녔다. 겨울이면 헛간 처마에 창대 같은 고드름이 매달렸다. 누구의 정수리 심장에 박히어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투명한 창들이. 어미는 고양이를 묻은 손으로 긴 장대를 들어 고드름을 쳐 냈다. 어미도 나도 무표정했으나 아비만은 늘 표정이 풍부했다. 미안해 고양.

 

시도 해설도 좋다. 깔깔한 혀끝으로 오른 발등을 핥아가며 본다. 야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껴 붙였는데 금방 다섯이 되어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열 개를 붙인다. 모든 페이지에 붙여도 좋으련만 그건 마음으로만 그리하기로 하고.. 봤던 곳을 다시 보는데 어제와는 달라진 마음이다. 붙여야 할 자리가 늘고 새로 바뀌어 황망하다. 그제는 왜 붙였을까 이곳에.  손끝을 빠져나가는 관계의 근원에 대해 몇날 며칠 시어에 묻고 묻는다. 인지하는 한은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나 관계의 것. 나는 그것이 중해서 색색의 종이를 떼어 붙이며 이리도 앓는 것이다.  물 같은 글씨로 수첩에 휘갈긴 메모를 보자니 흐르고 지나가는 것, 세월이 시간을 덮는 것, 고저 없이 지난 감정의 기억들을 돌이켜 보는 것에 생각을 맞추고 있다. 내속의 파랑이 고약해서 다독임으로 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이다. 그 즈음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마음의 주석을 달았더라.  

 

   

   왜 

   잊으면 낫지 않던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0-04-1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까 말까 망설였던 시집인데, 음 그냥 읽을까봐요. :)

2010-04-14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10-04-14 13:29   좋아요 0 | URL
아, 치니 님, 저도 그래야 할까 봐요.
이 리뷰를 읽으니 안 그럴 수가 없네요.
 
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인과 병동에서 초초하게 기다리다 진료를 받고 짐작보다 훨씬 큰 고통에 허둥대며 집으로 되돌아온다. 수치는 당장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서 나는 무슨 큰일을 치룬 사람처럼 당당하게 결근을 청한다. 빈 집은 어지러운 봄빛이다.  


약봉지에 인쇄된 37 이라는 숫자를 보고 실없이 웃는다. 행복이라기보다는, 어쨌든 나는 37의 숫자를 보고 웃으며, 숫자에 몰래 기쁘다. 서른일곱이라면 누군가와 아직은 연애를 할 만한 나이이기도 할 것이다.  


문경의 한참 외곽 한고비 큰 언덕을 지나 내 달은 동내어귀 비탈에서 거짓말처럼 윤의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파릇한 보리밭을 만난다. 나는 방금 비오는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나무기둥들을 손바닥으로 하나씩 쓰다듬고 올려다보고 눈에 새긴 후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었다. 여행 잡지에서나 나올 법 한 한 뼘 보리밭에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낡은 동그란 BUSSTOP 표지판이 기울어진 채 그림처럼 서 있다. 여행 가방에는 읽다만 그의 소설이 있고 나는 그림 같은 보리밭을 무심히 지나간다. 그래야 다시 올수 있다

윤의 소설은 연애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보다 설레는 일이 있을까. 내게도 내 이웃에게도 일어날 법 한 이야기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제법 고상하게 포장되어 통속도 각각의 이유가 있고 품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도 그의 얘기여서 가능하다. 그의 남다른 시선에는 관계에 대한 연민과 온기가 있고 포악하지 않으며 나쁜 연애도 산뜻하다.  


누구네 아낙이 딴 사내와 도망을 갔다 카더라는 풍문에도 그럴만했겠지, 눈 먼 사랑이 왔었던 거겠지, 불가항력 이었던 거야, 하고 슬쩍 넘기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의 얘기를 읽노라면 불온한 연애도 비루한 삶도 살아볼 만하고 견뎌 기대해볼 만 한 것이 되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유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내 나이를 더불어 새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윤의 소설을 읽고 총총히 부인과 병동을 찾은 서른일곱도 아닌 나는 이제 연애는 참말 힘들어진 것일 게다. 여전한 강원 산간의 대설주의보에 환호하는 마음과는 달리.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0-04-0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말씀하시면 냉큼 읽어볼 밖에요. :)

rainer 2010-04-14 10:09   좋아요 0 | URL
치우침이 심해서요. 불편함도 의도된 거라고 생각 되어지는걸요.(이런, 맙소사!)
리뷰가 평이고 독후 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페이퍼를 이쪽에 넣어봤어요.^^
(으흐흐)

2010-04-05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6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믄 한적한 골목 안 쪽 흐린 불빛의 작은 간판이 하나 매달린 허름한 식당의 문 앞에 앉아있다. 누가 드나들면 밤의 찬 공기가 내 등을 스치고 주방의 안쪽까지 들이 닥쳐 늙은 주인이 막 건져 썰고 있는 삶은 돼지고기의 흰 김을 헤치고 흐트러뜨려 시야를 가리고 늙은 눈썹에 서리게 한다. 담배연기와 거친 입담 어디서는 작은 속삭임들이 오가지만 우리가 마주한 자리는 맑은 술만 오갈뿐 기쁜 표정은 아니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꽃무늬 쟁반에 김이 나는 삶은 고기와 무친 굴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김치가 든 접시를 들고 한번, 마늘과 새우젓이 든 접시를 들고 한번, 콩나물국과 노란배추를 들고 한번, 소주를 들고 한번, 이렇게 와서 우리를 몹시 미안하게 만든다. D는 성큼 일어나 소주를 바꿔들고 온다. 굴이다. 이건 내가 몹시 좋아하는 겨울 배추와 부드러운 삶은 고기, 맛좋은 김치에 생굴인 것이다. 나는 소주를 여러 번 나눠 마신다. 두 달 째 변함없이 절뚝이며 걷고 계절 알러지에 고생이지만 소주를 마다하진 않는다. 나는 삼십년 동안 먹지 않던 굴에 대한 내밀한 얘기를 잠깐 D에게 말한다. 조금 슬퍼져서 세 번 쯤 말하기를 멈추다가 느릿느릿, 굴은 내게 그래. 하고 씨익 웃는다. 늙은 사장님 맛있어요? 묻고 나는 입 안 가득 배추와 고기와 굴을 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놀라 고개만 크게 끄덕인다. 말을 하고 나니 굴 얘기는 가벼운 것이 되어 작은 고통을 극복하게 하고 문득, 김형경이 고맙고, 보쌈은 맛있으며 나는 약간 행복해진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17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정말 환자처럼 등에 여러 개의 베개를 대고 앉아 책을 읽다 말다 하고 있어요. 색이 화려한 몇 개의 알약이 몸을 지치게 합니다. 같은 줄을 여러 번 읽게도 하죠. 소리내서도 읽기 힘든 몇 개의 수선화 이름들을 노트에 적어보다가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로 수선화의 이름들을 듣는다면, 그 수선화들은 훨씬 더 좋은 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음, 이건 어쩐지 연애편지 풍이로군요.

페루의 쿠스코에서 여섯 시간쯤 더 들어가면 마누라는 밀림이 나옵니다. 마누는 늪으로 가라앉기 전 아리아를 불렀다는 밀림의 침략자 피츠카랄도가 마지막으로 정복하고자 했던 곳이죠. 해발 사천미터에 이르는 산 정상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오다 해수면의 높이에 이르면 단 한 뼘의 공간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녹색의 밀림이 들어차 있는 곳,  일 미터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수선화의 색과 종이 바뀌는 곳, 세상 모든 새의 종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마누입니다.

어제는 베트남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춥지요? 여기는 나비가 납니다.‘  T의 목소리는  생기 있었고, 나는 더운 지방의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내 얼굴에서 나는 빛과 반짝이는 눈빛의 이유를 일행들에게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T의 얘기를 들을 땐 나도 나비가 나는걸 보고 있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잠깐, 아주 행복했습니다.

마누에서 서식하는 2만종의 나비가 군무를 추는 걸 구경하는 건 통나무 위의 한가로운 거북이뿐입니다. 작가는 피츠카랄도가 마누에 발을 딛지 못하고 죽어서 보지 못하게 된 자연에 경탄하며 통쾌해 합니다. 나는 그만 하하, 소리 내 웃습니다. 갑자기 세풀베다가 이전보다 백 배는 더 좋아지고, 그런 통쾌함을 누릴 수 있는 내 책 고르기에 잠깐 뿌듯해도 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생긴 것이 그렇습니다. 테오브로마, 라비오스 데 노비아, 타베르나몬타나 같은 열대의 색을 가진 수선화의 이름들을 당신에게 말하듯, 소리내 읽습니다.

T는 내게, 연금술사를 읽어요, 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이건 여행자의 얘기예요, 우리들 얘기지요. 하고 수줍게 웃더군요. 내일은 연금술사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2-15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15 0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er 2005-12-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님, 마음이 와 닿았습니다. 과한 칭찬이세요 ^^
ㅂ씨, 아니거든!!

치니 2005-12-1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금술사, 가 별로였던 저는, 더구나 여행길에 비행기에서 읽었던 저는,
괜히 알지도 못하는 T라는 분에게 샐쭉해질라고 해요. 후후.

sudan 2005-12-16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마음이 와 닿았다니, 기분 좋아요.

rainer 2005-12-1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금술사를 읽고 혼자 이랬어요. 어린왕자가 청년이 되면 연금술사가 되겠구나..
다른 사람 열이 좋다고 말하는 걸 나는 아니다, 라고 말 할 줄 몰라서 편리한대로
별을 갖다 붙입니다. 세상에! 별 주기는 얼마나 고맙고 편한 방식인지. 주머니에
있는 별이 두 개 뿐이라서, T에게 하나 꾸어다 세 개를 줍니다. 북쪽은 어찌나 추운지..

2005-12-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er 2005-12-1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고 말 하는 것도 얼마나 우스우냐.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