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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정말 환자처럼 등에 여러 개의 베개를 대고 앉아 책을 읽다 말다 하고 있어요. 색이 화려한 몇 개의 알약이 몸을 지치게 합니다. 같은 줄을 여러 번 읽게도 하죠. 소리내서도 읽기 힘든 몇 개의 수선화 이름들을 노트에 적어보다가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로 수선화의 이름들을 듣는다면, 그 수선화들은 훨씬 더 좋은 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음, 이건 어쩐지 연애편지 풍이로군요.
페루의 쿠스코에서 여섯 시간쯤 더 들어가면 마누라는 밀림이 나옵니다. 마누는 늪으로 가라앉기 전 아리아를 불렀다는 밀림의 침략자 피츠카랄도가 마지막으로 정복하고자 했던 곳이죠. 해발 사천미터에 이르는 산 정상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오다 해수면의 높이에 이르면 단 한 뼘의 공간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녹색의 밀림이 들어차 있는 곳, 일 미터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수선화의 색과 종이 바뀌는 곳, 세상 모든 새의 종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마누입니다.
어제는 베트남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춥지요? 여기는 나비가 납니다.‘ T의 목소리는 생기 있었고, 나는 더운 지방의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내 얼굴에서 나는 빛과 반짝이는 눈빛의 이유를 일행들에게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T의 얘기를 들을 땐 나도 나비가 나는걸 보고 있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잠깐, 아주 행복했습니다.
마누에서 서식하는 2만종의 나비가 군무를 추는 걸 구경하는 건 통나무 위의 한가로운 거북이뿐입니다. 작가는 피츠카랄도가 마누에 발을 딛지 못하고 죽어서 보지 못하게 된 자연에 경탄하며 통쾌해 합니다. 나는 그만 하하, 소리 내 웃습니다. 갑자기 세풀베다가 이전보다 백 배는 더 좋아지고, 그런 통쾌함을 누릴 수 있는 내 책 고르기에 잠깐 뿌듯해도 합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생긴 것이 그렇습니다. 테오브로마, 라비오스 데 노비아, 타베르나몬타나 같은 열대의 색을 가진 수선화의 이름들을 당신에게 말하듯, 소리내 읽습니다.
T는 내게, 연금술사를 읽어요, 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이건 여행자의 얘기예요, 우리들 얘기지요. 하고 수줍게 웃더군요. 내일은 연금술사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