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종일 햇살이 좋았다.
세잔의 산을 찾아서를 읽고 있던 목요일이었는데, 그러는 목요일이 벌써 세 번이나 되어서 좀 투덜거리는 기분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은 반 페이지 어느 날은 석 장, 이런 식이었다.

가을이 깊다. 무엇이든지 덜 생각하고 절반만 떠올린다.
투쟁적인 심정으로 이를 꾹 악물고.

나는 오늘 우영창의 시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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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11-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갈한 저 자리에선 함부로 큰소리도 못낼거 같아요.

blowup 2006-11-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 두 시. 빛이 잘 안 들어오는 방에 앉아 있어요.
마루엔 저렇게 긴 그림자가 가오나시처럼 기다리고 있을텐데.

rainer 2006-11-09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빛이 거짓말을 하는거예요. 그냥 난 쿵쿵 소리내면서 걸어다녀요 ^^
나무님, 이런 오후에, 단 감을 깍아 먹으면서 마시던 버드와이저가 좋았던 날들이 있었어요.
그녀는 소식이 없군요.
 

사실은 더 비참하다
비굴해질 수는 없으니까 비참한 감정을 좀 품고 있다가
쓸쓸한 느낌으로 농도가 묽어지기를 기다린다
마음의 그늘이 넓어지면 그때는 내가 내 속에 앉아
쉬고 있는 느낌도 든다
누구를 불러 앉혀 이야기를 나눌 형편은 못되고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소리라도 들려오면
미소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느덧 두부장사의 종소리는 저녁의 냄새를 불러오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는 사람의 식탁에
천연스럽게 앉아있고 싶어진다
술을 한 잔 얻어 마시면
턱없는 얘기에도 맞장구를 치다가
돌아올 땐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어도 좋을 것이다
집에선 없는 일이 밖에선 있는 법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팔깍지 끼고 누워 있다가
새삼 분한 마음이 일어나면 모로도 누워보는 것이다

    - 우영창

 

시를 읽다가 정말 크게 웃었지만,  이건, 정말,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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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10-0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사실이지요.

--새삼 분한 마음이 일어나면 모로도 누워 보는 것이다.

치니 2006-10-05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레이니어님도 우영창 시 중 이 시를. 저도 이 시가 유독 마음에 와 닿았는데...

불륜의동화 2006-10-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크게 웃었다는데 공감!!!

rainer 2006-10-1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의미에서 술을 한 잔 마시지요.
제일 비참한 사람이 사는겁니다.
뭐, 제가 살 것 같군요. 아니면 동화일까?


불륜의동화 2006-10-12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내 쪽이 유력한걸
 

1.

몇 주 째 비였다가 햇살이 눈부신 화요일 아침-나는 이방인을 읽으려고 햇살이 따가운 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래야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처럼- 창 밖의 햇살이 켜놓은 형광등보다 밝다. 여름 나뭇잎이 내가 앉은 쪽의 창을 툭툭 건드리는 때 나는 귀찮은 듯 느릿느릿 페이지를 넘겨 드디어 이방인을 읽기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과도한 빛에 거리감각이 무뎌져 책상 모서리에 몇 번 다리를 짓찧어 잔뜩 눈을 찡그려보지만 그것이 햇살의 이유인지 고통의 이유인지도 모호하여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읽는 뫼르소는 깊은숨을 푹푹 쉬게 할 만큼 멋지다. 누가 고막이 터질 듯 요란스런 노래를 부르다 정지 버튼을 눌러 음악이 멈춰버리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순간처럼 저절로 숨이 멈춰지는 약간 난감한 기분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2.

하늘이 바다 같다.
노트의 첫 줄에 이렇게 적혀있다. 그리고는 미토콘드리아에 사무친다, 시가 한 편. 나머지는 나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험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지만, 그 날이 꼭  오늘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안정적이고 평온한 것을 뒤흔들고 싶은 못된 욕망 같은 것이 있다. 온전한 모양을 갖춘 것을 파괴하는 재미. 틀을 깨고 옳지 않다 여기는 길로 가보고 싶은 충동 같은 것. 그래서 당신이 떠난 여행길이 내겐 고통이다. 차마 말못하고 무심을 가장하여 외면하는 야비함. 고통은 내 것이 더 크다.

순천이 고향인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매료된 적이 있다. 처음 그 사람 목소리를 듣던 날, 나는 다섯시간이나 그 사람의 목소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곱고 단정한 목소리로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나는 그 남자 목소리만 있으면 비 내리는 이 백일을 태양 없이 견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쪽이 고향인 그 남자와 뭔가 낭만적이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비가 많던 여름 내게 우산을 씌워준 며칠 후, 큰 부도를 내고 도망자가 되었다. 이런 여름이었다.

 

3.

어디 물가, 먼 바다나 계곡 같은 곳에서,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닭을 여러 마리 끓이는 중이거나, 햇감자 옥수수 같은 걸 마당가에서 삶고 있을 것 같았다. 끓는 닭이 암탉일까에 생각이 미치자 그 때부터 내가 웃기 시작했다. 수박을 쪼개 먹고 달게 낮잠을 자는 중일 거라고도,  구름 같은 걸 보고 있거나, 높은 나무의 자두를 따서 아이들에게 먹이거나 하며. 그러는 중 당신 생각의 어느 언저리에 내가 있을 까, 혼자 묻기도 했다. 그렇게 먼 곳까지 내 소리가 닿지 않아서 우리는 혹시 이별 같은 걸 한 게 아닐까도 생각 되었다.

 

- 오래 된 파일을 열었더니, 지난 여름이 몇 토막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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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하지 못하는 말들이 흘러 넘쳐 어느 날부터 내 소리만으로도 귀가 따갑다. 난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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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이 녀석, 바람을 가르던 날렵한 등뼈를 가진 한 마리 개였을 것이다. 힘있는 네 개의 다리로 땅을 딛고 등뼈를 활처럼 휜 채 들판을 가로지르던 날 쌘 녀석. 봄 나비를 잡으려고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르던 어여쁜 등뼈. 한쪽 발로 집쥐를 누르던 힘있는 넓적다리와 등뼈를 가진 누런 털의 집짐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녀석의 등뼈 사이사이에 단단히 박힌 살집을 떼어낸다. 손끝이 베일 것 같은 뼈와 뼈 사이의 공간을 통과하면서 모나지 않은 둥근 뼈마디에 몇 번씩 놀란다. 손톱의 틈에 개의 살점들이 박혀 있다. 비누로, 독한 세제로 닦아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잘 삶아진 탄력 있는 개의 껍질을 잘 벼른 부엌칼로 얇게 저민다. 단호하지 않으면 내 손가락을 베일 것이다. 손톱에 상처가 나게 꼼꼼히 발라내도 등뼈를 감싼 단단한 살점들은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등뼈 틈 사이의 살을 떼어 내기 위해 살짝 힘을 주어 분지른다. 뼈 사이로 새빨간 연골이 드러나 비명을 지르며 뼈를 떨어뜨린다. 녀석을 발라내면서 들을 가로지르던 한 마리의 온전한 개를 떠올린 걸 그제서야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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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6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er 2006-07-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