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무렵, 쌀가루 같은 눈이 잠잠히 내리고 독주를 몇 잔 마신 나는 신화 같은 미야베를 읽다가 간간히 창밖을 보기도 하고 쳇 베이커가 이 빠진 소리로 노래 할 때 두어 번 졸음에 겨워 글자들이 흐물흐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다섯 시 11층. 보이는 것은 콘크리트 뿐 인 찬 도시에 데울듯 불을 환히 켜두고 창가에 앉아있다. 스테이 리틀 발렌타인 겨울 굴과 배추만 먹고 살아도 좋겠는 계절에 떡시루에 내린 고운 쌀가루 같은 눈을 오래 본다. 짝짝짝. 베이커씨가 겨울 난로 같고 하나 둘 켜지는 이웃한 집의 부엌 등이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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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0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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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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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어두컴컴하고 인적이 드믄 한적한 골목 안 쪽 흐린 불빛의 작은 간판이 하나 매달린 허름한 식당의 문 앞에 앉아있다. 누가 드나들면 밤의 찬 공기가 내 등을 스치고 주방의 안쪽까지 들이 닥쳐 늙은 주인이 막 건져 썰고 있는 삶은 돼지고기의 흰 김을 헤치고 흐트러뜨려 시야를 가리고 늙은 눈썹에 서리게 한다. 담배연기와 거친 입담 어디서는 작은 속삭임들이 오가지만 우리가 마주한 자리는 맑은 술만 오갈뿐 기쁜 표정은 아니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꽃무늬 쟁반에 김이 나는 삶은 고기와 무친 굴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김치가 든 접시를 들고 한번, 마늘과 새우젓이 든 접시를 들고 한번, 콩나물국과 노란배추를 들고 한번, 소주를 들고 한번, 이렇게 와서 우리를 몹시 미안하게 만든다. D는 성큼 일어나 소주를 바꿔들고 온다. 굴이다. 이건 내가 몹시 좋아하는 겨울 배추와 부드러운 삶은 고기, 맛좋은 김치에 생굴인 것이다. 나는 소주를 여러 번 나눠 마신다. 두 달 째 변함없이 절뚝이며 걷고 계절 알러지에 고생이지만 소주를 마다하진 않는다. 나는 삼십년 동안 먹지 않던 굴에 대한 내밀한 얘기를 잠깐 D에게 말한다. 조금 슬퍼져서 세 번 쯤 말하기를 멈추다가 느릿느릿, 굴은 내게 그래. 하고 씨익 웃는다. 늙은 사장님 맛있어요? 묻고 나는 입 안 가득 배추와 고기와 굴을 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놀라 고개만 크게 끄덕인다. 말을 하고 나니 굴 얘기는 가벼운 것이 되어 작은 고통을 극복하게 하고 문득, 김형경이 고맙고, 보쌈은 맛있으며 나는 약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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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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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당신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내가 더딘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가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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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키우는 잔디 인형에 싹이 났다.  

엄마도 싹이 안날 줄 알았지!  

키득키득 웃는 아이가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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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보내준 고구마에서 엄마 땅의 냄새가 맡아진다. 엄마가 육십년 째 일구는 땅의 흙냄새.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씻겨 흐르는 흙에서는 다른 냄새도 맡아진다. 엄마가 태우는 볏단냄새, 콩깍지 냄새, 열기에 마르는 고추냄새, 흙벽이 건조되는 냄새, 뭔가가 으깨져서 나는 냄새. 고구마 표피의 흙에 스며 흐르는 물에 되살아나 내 코의 기억을 일깨운다. 나는 잠깐 감동한다. 심고 캐고 거두어 먹이는 엄마의 마음이 고마워서 킁킁대며 기억의 냄새를 오래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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