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약속은 아니다. 다만 지켜졌으면 싶은 약속일 뿐.

어둡다.
백야도 아니고.. 중얼거린 게 얼마라고 어둠은 순식간이다.
정미경을 들고 걷는다.
큰 가방엔 와인이 한 병  들어 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지호군과 J는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다.
선명한 깊은 파랑 무늬가 새겨진 일본도자기 컵을 여러 개 닦는 중이다.
나는 저 컵이 늘 마음에 든다.
실내는 약간 어둡다.
샹들리에는 언제부터인가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가 그대로 매달려 있다.
음영이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어서 우리는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손님이었다가 친구가 된 J는 주전자의 물과 냄비의 물을 섞어 마시기 좋은 온도의 따뜻한 물을 만들어서 내게준다..
나는 그런 섬세함이 마음에 들지만 J의 얼굴은 적응이 쉽지 않다.
희고 작은 얼굴 큰 키 날카로운 코 가지런한 치아 낮고 조용조용한 목소리 부드러운 머릿결 결코 변하지 않는 인형같은 피부색. 그래서 생각을 짐작 할 수 없고, 나는 그런 사람이 불편하다.

우리는 셋이다.
나는 물을 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바람이 불어 어둑해진 길가의 벚나무를 마구 흔든다. 종일 이랬다.

지호군, 비가 올 듯 종일 바람만 불어요. 이건 비가 올 바람인데..
나, 으응. 바람이 맨살에 척척 감겨. 습기가 많은 바람이야.
J, 창밖을 쓰윽 한번 내다보고 읽던 책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목요일.
나는 약속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버렸다.
탁자에 정미경을 올려두고 나는 바람구경중이다.
밖은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가 있는 실내정도의 어둠이다.

누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가씨, 바닐라아이스커피를 주문하고 삼각형을 그리고 앉아 있던 우리의 구도는
잠깐 깨어진다.
지호군은 여전히 네이버의 처음 페이지이고, 인형같은 J는 아직 한 페이지도 책장을 넘기지 않았고, 나는 흐릿한 눈으로 정미경의 제목을 잠깐 내려다 보다가 다시 바람 구경중이다.

바닐라 아가씨가 나가고, 나도 일어선다.
또 올께요.
둘은 표나게 안도의 목소리로 예에.. 하고 웃는다. 칠월엔 풍경에 가서 연어구이랑 소주 마셔요.

나는 목요일 밤으로 한 쪽 발을 내 딛는다.
중요한 약속은 아니었다.
다만, 비를 품은 바람이 종일 가슴을 뚫고 숭숭 지나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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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2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er 2008-07-02 12:05   좋아요 0 | URL
나두.
김치찜 그거 조금 문제있는 음식같아.
중독성이 엿보여.

 


그녀는 뭔가 좋지 않은 병 같은 것을 앓고 있는 것이다.
남들보다 쉽게 나이 들지 않는 병. 이웃보다 더 순수한 병. 손님보다 착한 병. 뭐.. 그런.
우리는 그녀가 날라다 준 소주를 마신다. 그녀의 엄마는 솜씨 좋은 요리사.
그녀의 아버지는 머리가 하얀 반백의 구부정한 할아버지이지만 좋은 인상이다.
나는 미더덕을 자꾸 골라 먹으면서 그녀의 아버지를 훔쳐본다. 그녀는 오늘 어딘가 더욱 모라자 보이는 표정이다. 나는 회오리를 만들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마신다. 내게는 그래도 되는 밤이다.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나이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아.’
‘으응.. 그렇지만 요즘은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참 부럽다.’
‘아버지 없는 사람이 주위에 몇인지 알아?.’
‘윤고문, 반고문, 기용이. 기용이는 엄마도 없네. 용식이. 너. 나. 음.. 그리고.. ’
‘거봐,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아.’
 

멍청하다.
그게 위로가 될거라고 생각하다니. 갯바위에서 바다낚시를 하다가 익사한 아버지를 삼일 만에 건져내고 뉴스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에게 나의 아버지 타령은 조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당장 아버지가 필요하다.

택시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내 친구. 녀석은 전날에 내일이 아버지 제사니까 아침은 제 집에서 먹으라고 우리를 불러 모으던 예민한 놈이다. 나는 아버지 얘기가 하고 싶다. 그래서 전화를 하지만, 이미 잔뜩 나이가 먹은 내 친구는 회식중이고 ‘아’ 자도 꺼내기 전에 끊어 임마! 그러면서 킥킥 웃는다.

어제는 울었고, 오늘은 아버지.

나는 그냥 일지매를 좋아하고, 카스를 마시고, 처음처럼의 0.5%조금 더 알콜을 선호하는, 아구찜의 작고 통통한 미더덕을 열심히 먹는, 아버지를 조금 그리워 하는, 이웃보다 조금 더 순수한 ^^ 푸른월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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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6-1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지매, 재미있나보네요. 아직 못봤는데. ^-^

rainer 2008-06-1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지매는.. 아들녀석이 좋아해요. ^^
하나뿐인 아주 작은 TV가 안방에 있어서 아들이 보면 어쩔수 없는척! 재밌게 봅니다.
 


종희언니가 놀러왔다.  나는 큰어머니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저학년의 여자아이다. 아마도.
큰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방이 두 개 왼쪽에 한 개인 마루가 진짜 큰 집의 오른쪽 두 번째 방에서 미혼의 사촌언니와, 여상에 다니던 막내사촌언니 사촌언니의 친구 종희언니, 나 이렇게 넷이서 자고 있다. 조금 좁다.
종희언니는 명랑해서 사촌언니들이 같이 자는 걸 좋아한다. 그날도 우리는 사촌언니가 지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흑백TV를 보면서 좀 놀다가 잠이 든 것일 텐데, 새벽이다.

누가 운다. 나는 잠이 깼고, 종희언니도 깼다. 오래 운다.
모두 숨을 죽이고 아직 잠들어 있는 체 하지만 모두 깨어있다는 걸 어린 나도 안다.
날이 점점 밝아온다.
우리는 이불속에서 나오길 미루고 격자 창호지 사이로 더 밝은 빛이 들어올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척이다.

‘자다 왜 그렇게 울었어?’
‘그냥... 갑자기 서러워서...’
‘으응...’

지금의 나는 갑자기 서러워서 자다가 한참을 울던 그날의 사촌언니보다 훨씬 어른이다. 무엇과도 자주 사랑에 빠지는 위험하고 무방비의.

현재의 밤이다.
운다. 무척 오래 운다. 냇물처럼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신다. 숨을 쉬는 게 힘겨울 만큼 오래 운다.
후.. 아침 얼굴은 의외로 말갛다.
누가 보기라도 한 듯 부끄럽지만 비갠후의 날씨 같다.
그랬던거구나, 사촌언니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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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11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웃어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웃는 인형이다.
소리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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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8-05-2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리가 없지요.. ? 그렇지요..
오랜만.. 반가워요..
(이 말줄임표만이 여전하네요 ㅋㅋ)

치니 2008-05-2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가워요.

rainer 2008-05-2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뭘 적으면 다음날 되게 챙피해져요. '_';
잘 지내시지요?

불륜의동화 2008-05-21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rainer 2008-05-22 10:48   좋아요 0 | URL
괜찮아, 깃털같이 많은 날인데 뭐.

2008-05-22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rainer 2008-05-22 10:48   좋아요 0 | URL
그러기도 하지요. 밤에는.
 


J는 오래 견딘 부서의 여사원을 해고하기 전에 몇 달 간 깊은 고민을 했다. 결국 그녀를 해고하고 새로운 여자사원을 채용했는데, 이전의 그녀 못지않아서 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를 고심하게 되었다. J는 짧은 머리의 그녀가 오늘, 아주 길고 검은 가체를 쓰고 출근해서 팀원들을 기겁하게 했다고 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벤트로 즐겁게 지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가치관이 빈약하고 깊지 않은 생각뿐이어서 밟는 곳마다 지뢰밭이라고 나는 고민이 산더미인 J에게 하나의 고민을 더 안겨줬다. 하나를 견디고 넘기면 또 다른 지뢰밭인 일상인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나는 J에게 가발을 쓸까? 아주 긴 놈으로. 이러며 쓰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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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2-1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제 생각과 너무 닮았어요. ㅠㅠ

rainer 2007-12-13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가을 같은 이랄밖에요. 최승자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