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십 대에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든 조각가 로댕의 사방에서 밀려드는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답장을 쓰는 비서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된 예술가를 흠모한 청년 릴케는 그에게서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방식을 배우지만 상대적으로 삶과 죽음과는 유리된 현실부적응자로 다시 현실에 부딪히며 예술의 멘토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알아가며 위대한 시인이 되어가는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둘은 불화와 결별, 재회 등 굴곡 많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예술에서의 성취는 반드시 삶의 성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둘의 대비되며 교차하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언어가 빚어낸 삶의 비가와 섬세하고 처절한 터치가 완성해 낸 빛나는 조형물들의 틈새에는 미처 다하지 못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들, 기본적인 배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남기고 간 예술적 성취는 지금도 남아 삶의 온갖 책무에 너덜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성취를 가능케 한 가족들의 희생은 기억으로도 남지 않았다. 사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매일을 아름다운 시로 채우고 눈부신 조각으로 연인을 감동케 하는 드라마는 현실을 딛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이러한 담담함에 더 수긍이 간다. 대단한 드라마로 비장미가 가득한 그런 과장이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진짜 이야기. 결국 시간의 결이 모든 것을 훑고 가 삶의 이야기로 실을 잣는 그러한 이야기. 그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예순아홉 살이 되어 살아남은 자라는 지위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실이라고 느꼈다.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골트이야기>
팔십 여년에 걸친 이야기. 아일랜드 역사의 격동은 한 가족의 평범한 소망과 일상의 행복을 흔들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드라마로 치닫지 않는다. 언제나 시간은 사건은 그 안의 삶을 쓸고 지나가지만 생과 삶의 지축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거나 단편적이고 정합적인 스토리로 수렴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서사로 쓸어담아 완결되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말하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다행히 <루시골트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누구도 서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그렇듯이. 어떤 날이든 그 속의 시간은 서둘지 않고 지나가니까. 그걸 보고 배우면 된다. 서둘 필요 없다.
-<루시골트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서둘지 말자. 하루하루 속에 삶 전체가 나의 전 존재가 담뿍 담겨 있을 테니 천천히 하루하루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