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다이어리를 써왔다. 매일의 일상에서 기억해 둘 만한 일들 위주로 적어둔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는 그러한 일상의 기록이 성장기가 되어준다. 때로 잘못 기억하고 있던 일들, 좁은 소견들이 부끄럽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글자는 점점 덜 귀엽고 크기도 커지고 기록의 세밀함도 감정의 파도도 줄어든다. 글씨들도 성장하고 늙는 몸이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이것들이 남아서 좋을까 싶어졌다. <수런거리는 유산들>의 저자는 어머니,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며 느끼는 피로감과는 별개로 젊은 시절 그들이 주고 받은 연애 편지를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찬연했던 사랑의 이야기를 복원해 내며 애도 작업을 마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흔적과는 달리 내가 적어가는 것들이 정말 남아도 좋은 걸까? 확신이 옅어지며 기록하는 일에 대한 정열도 줄어드는 와중에 만난 책.

 

 

 

 

 

 

 

 

 

 

 

 

 

'밥장'이 여자 작가인 줄 알았다.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리고 하는 일을 무심코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했었나 보다. 그는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남자 작가다. 쓰고 기획하고 저지르는 데에 평범하지 않은 재능이 있어 보인다. 자신이 쓰고 그리고 지니고 있는 몰스킨과 또 이러한 몰스킨에 자신의 일상이나 직업적 기록을 남기는 다른 이들의 내밀한 기록과 인터뷰도 있다. '몰스킨'이라는 브랜드는 하나의 접점이자 대명사화되어 있지 비싼 노트의 브랜드 네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보고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손글씨 사진들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접사가 잘 되어 있다. 그래서 사진이 아니라 또 하나의 본문으로 보인다. 자기를 설명하고 삶을 요약하는 데에는 어쩌면 수많은 이해받지 못하는 말들보다는 이러한 사물들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수첩 안에 작은 팝업북을 만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모눈 격자에 맞추어 도면을 그리고 소믈리에는 와인의 맛과 향을 기록한다.

 

 

 

어젯밤 <케빈에 대하여> 영화를 보고 머리를 한 대 망치로 맞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추상성을 해체하는 일이다. 낭만성의 허구를 가감없이 목도하는 과정이다. 내 속에서 나왔다고 내 앞에 있다고 전적으로 내 의지, 감정에 귀속되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주 많이 잊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나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는 한 작은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그의 성장에 어떤 지원을 하느냐가 때로 어마어마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학대'는 의외로 아주 쉽게 작은 데에서 시작되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린 램지 감독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섬세하게 영상화한다. 이러한 기록을 나의 다이어리에 남겨둔다. 나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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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6-03-21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체를 아는 것이 전부인 일, 이유를 묻는 순간 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케빈에 대하여.
처음에는 양육과 모성, 나와 다른 존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작년 실연한 친구가 제게 `왜 대체 그사람은 나를 떠났을까/`라는 말에 `왜냐고 묻는 순간 백퍼 네가 질 수밖에 없어. 이유같은 거 알려고 하지 마. 존재만 받아들여`라고 말하다가 흠칫, 놀랐어요. 그것은 오히려 모든 저지름과 악에 관한 이야기.
(여기까지 쓰다가 갑자기 격하게) 그러고 보니 왜 자식이 부모에게 전생의 빚 받으러 온 존재라고들 하는지 알 것 같지 말이어요!!!! 흐흫

blanca 2016-03-21 15:35   좋아요 0 | URL
삶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있고, 왜? 라는 물음에 답보다는 그냥 질문 자체가 떠오르는 걸로 끝나 버리는 일이 많다는 걸 배워가는 게 늙는 일인 것 같아요. 감독도 여배우도 다 그 미묘함을 정확히 포착한 노련함이 너무 좋았어요. 아우, 어른들이 하는 말은 결국 인정하게 되어버리네요. 자식은 채무자 맞아요. ㅡㅡ

단발머리 2016-03-3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에 대하여>는 오랫동안 피하고 안 봤던 영화인데,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 더 이상 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게 두려웠던 것 같아요.

아이가 악마가 되려하는 그 지점에, 엄마의 어떤 실수 혹은 유약함이 있지 않았나, 어느 정도는 그것이 엄마의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요. 그게 두려워서.... 저는 아직도 미뤄두고만 있네요. 아.... 케빈....

blanca 2016-03-31 13:08   좋아요 0 | URL
이 영화를 보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한창 배변훈련 중에 봐서 다 큰 케빈이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엄마의 그 비난하는 듯한 시선에 아팠어요. 이게 양육으로도 어쩔 수 없는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야기라는 의견도 있지만 솔직히 저는 케빈을 진정한 의미에서 안아주지 못한 엄마의 그 냉랭한 시선을 찾게 되더라고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이 영화는 참 잘 된 것 같아요. 이 영화 보고 일주일이 힘들었다는 글도 읽었어요. 저는 보다가 울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