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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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로서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소설가로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나는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낸 적이 없기에 왜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조목조목 댈 말은 없다. 어느 날 여동생이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들어왔다. 누군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며 읽어보라 했단다. 이윽고 나는 동생 대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었지만... 끝내 완독하지 못한 소설로 남았다. 그 다음부터 막연히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청춘에 그의 작품과 조우했던 극적인 순간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오히려 너무 젊어서 그의 소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서들, 느낌들과 나 사이에는 분명 어떤 휑한 간극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야기하는 하루키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다. 대인관계도 활발하지 않고 그저 규칙적으로 일어나 근육을 단련하듯 필력을 연마하는 겸손한 생활인이다. 그런데 그가 썼다는 이야기들에는 흔히 방황하는 청춘이 있고 꿈틀대는 심연의 욕망이 있고 때로 미처 실현되지 않은 좌절된 꿈들이 있단다. 그는 나의 엄마 연배이다. 그러한 그가 썼다는 이야기가 정말 그 어떤 젊음에 가닿을 수 있을까, 나는 의심했다. 그러니 내가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의구심이 항상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쩌다가 이동진과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색깔 없는 사내 다자키 쓰쿠루와 엮여 버리고 말았는 지. 만약 이번에 다자키 쓰쿠루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영영 하루키의 소설과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매혹된 지점은 읽기도 전에 서른여섯이 스무 살로 돌아가서 푸는 어떤 실타래라는 것이다. 종종 아니 이제는 가끔 나는 그 비슷한 연배에서 스무 살로 곧잘 돌아가서 움직이고 느끼고 사랑하고 울고 좌절하는 나를 무연히 지켜본다. 그 나이의 나는 지금의 '나'와 백만년보다 더 떨어져 있다. 분명 똑같은 나인데 지금의 깨달음과 노쇠함을 가지고는 그 시절의 나를 곱게 지켜볼 도리가 없다. 아마 그런 아이가 내 주변에 지금 있다면 나는 참 황당한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잔소리와 훈계를 해댈 지도 모른다. 나는 스무 살에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었다.

 

내 인생은 스무 살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발걸음을 멈춰버린 것 같다고 다자키 스쿠루는 신주쿠 역의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그 이후 찾아온 나날들은 거의 무게가 없었다. 시간은 잔잔한 바람처럼 그의 주위를 조용히 불어 지나갔다. 상처도 남기지 않고 슬픔도 남기지 않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이렇다 할 기쁨도 추억도 남기지 않고. 그리고 이제 그는 중년의 영역으로 접어들려 했다.

-p.421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스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로 시작하는 다자키 스쿠루의 이야기.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 그룹에서 제명당한다. 이유도  모르는 채 모두 그의 연락을 피한다.  그는 고향 친구들의 왕따에 여린 속살이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파한다. 이후로 그는 대학을 마치고 철도기업의 지하철역을 설계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것처럼 보이며 그 일을 수면 밑으로 가라앉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며 다시 그 일을 떠올리게 되고 그녀의 제안과 독려로 스무 살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옛 친구들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 그는 함께 했던 친구들이 때로는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남고 때로는 부적응자가 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모습들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 우정의 펜타곤이 무너진 지점에 그룹의 일원인 시로가 자신을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지목한 것을 발견한다. 도저히 그럴 캐릭터가 아니었던 그였지만 친구들은 저마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그녀의 위증 아닌 위증을 수용한다. 하루키가 주목한 지점은 이곳이었다. 남녀가 섞여 있던 친구 집단에 그 어떤 이성적 호기심도 허락하지 않았던 암묵적 동의 밑에 깔려 있던 저마다의 어두운 욕망, 질투가 마침내 옅은 속살을 뚫고 나온 곳. 누구나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욕망이 해소되지 못한 지점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다는 통찰. 만약 그랬더라면,의 가정들이 난무하는 추억으로의 회귀 지점에서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똑같은 오늘에 대한 긍정. 여기에는 매일 아무리 힘들어도 육체 단련을, 글쓰기를 미뤄두지 않는 성실한 절제력을 가진 하루키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욕망을 응시하지만 그 욕망에 함몰되는 인간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욕망을 억지로 비끄러매고 숨기면서 때로 불거지는 비극으로 인간의 삶 전체를 포박하지 않는다.

 

쓰쿠루가 대학에서 만나게 된 연하의 친구와 그를 그룹에서 내치게 만든 여자 친구 시로와 쓰쿠루를 연결하는 지점에 리스트의 피아노곡 <르 말 뒤 페이>가 있다. 그 자신이 재즈바를 해서 그런지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소설적 정서와 장면의 여운을 고조시키는 데 아주 절묘한 역할을 한다. 그 어떤 부속이 아니라 순간 핵심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개별의 이야기를 보편의 그것으로 확대시키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단지 무미건조한 쓰쿠루가 겪은 왕따의 아픈 추억에 대한 치유의 여정이 아니다. 직업병에서 비롯된 면도 있겠지만 쓰쿠루가 지하철역에서 관찰하는 그 수많은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들의 정경, 특이한 유실물들에 대한 역직원들과의 대화, 아버지의 방황기를 통해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대학 후배와의 대화 들은 내러티브를 뛰어넘는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진지한 철학이 있다. 사람의 내면에는 아무리 친밀한 타인도 심지어 그 자신도 응시하기 힘든 어두운 심연이 있다. 그 심연에 조약돌을 던져 생기는 파문이 번져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자리에 하루키가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치게 골몰하거나 함몰되지 않는 미덕에 그가 거는 타인과의 공명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한 '너'와 충실하게 걸어가는 것이 삶에 대한 책무라는 것을 하루키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이제서야 온전히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냈다. 그것은 분명 이십 대의 나로부터 내가 걸어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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