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서문 중
그 어두운 방이란 바로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 천당과 지옥의 접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환상의 공간이 바로 내가 꿈꾸는 공간이다.
-김연수 <여행할 권리> 중
일산에서 이제 사십대와 육십대의 들머리에 진입한 김연수와 김훈은 종종 어울린다. 그 둘의 문체는 완연히 다르다. 김훈의 그것이 건조하고 치열하게 불가해한 운명에 맞선 흔적들을 밀어넣는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끝까지 가보려고 고군분투하는 그 과정 자체를 몇 줌씩 아쉬움과 그리움에 묶어 보여준다.
둘이 만나는 지점은 언어로 함축해 낼 수 없는 그것에 가 닿았을 때 느끼는 막막함과 아쉬운 체념의 공감이다. 그럼에도 그 둘은 세계의 끝으로 밀고 나간다.
삼십대와 오십대는 지나온 시간들이다. 다만 새천년에 당도하기 직전 출발의 어느 지점 그 시간을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둘 다 이 여행을 1999년에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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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풍륜에 몸을 싣고 세상의 길들을 몸 속에 들여보냈다 흘려보내며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겨 결국 평평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김연수는 세계의 끝 국경에서 붉은 아이스크림 같은 태양을 대면하고 존재와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아직 답해지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필연과 우연의 조합 속 시간들에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답을 깨닫는 그것보다 설익은 날것일지라도 그것대로의 미숙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오십대의 깨달음으로 삼십대로 돌아가 본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질문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속단하고 실수하는 처절함이 가지는 중량감은 존재의 중량감과 통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많이 넘어지고 가장 많이 울었던 시간들, 내가 가장 나를 절절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때는 꿈을 꾸고 있는 세계 앞에 유일하게 혼자 깨어있는 나 자신에 대한 착각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젊음은 언제나 슬프고 언제나 부럽다.
김연수는 소통이 하나의 미망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를 서사화하고 있다. 김훈은 담담하게 그런 소통에 대한 열망마저 밀어놓고 묵묵히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들에 대한 관조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의 삶에서 김연수가 여행 중 만난 외국인들과의 소통에서 느끼는 그 벽 앞에서 감정적 좌절을 체념적 이해로 마무리한다면 김훈은 소통 그자체에 대한 열망을 접어버리고 그저 기착지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나를 덜어주고 너를 나누어 받고자 하는 욕망이 그저 너의 삶의 체험들을 나눠 가지고 그 체험들에 연결되는 감정 안에서만 스치는 것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으려면 결국 우리는 나이들어야 하는 것인지. 살아간다는 것도 결국은 나는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과정인 것인지 질문들이 넘쳐난다. 어느새 나는 김연수처럼 질문만 하고 있다.
스무 살적 나는 서른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고 나를 둘러싼 사물들에 시선을 던지는 대신 내 안으로 끊임없이 침잠했다. 삼십을 넘고 나서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눈물겹다. 하나 하나 눈에 박아넣고 마음으로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밖에 알아나갈 수 없다. 나는 사십 이후의 삶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상상하지 않아도 이제 그 이후의 아름다움들이 예비되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덧없는 것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은 김연수처럼 사십 고개를 넘을 것이고 김훈처럼 구태여 고달픈 진화의 대열에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먹이사슬 맨 밑바닥의 아름다움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오십 이후를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영원히 가져가고 싶은 것은 그래도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김훈의 끝나지 않는 소망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다는 무리한 욕심이다.
원근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지상의 한 점 위에 결박하고, 그렇게 결박된 자리를 세상을 내다보는 관측소로 삼는다. 이 부자유는 사람들의 눈 속에 편안하게 제도화되어 있고 그렇게 관측된 세상은 납작하다.
-김훈 <자전거여행> 중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김연수 <여행할 권리> 중
나를 좌표로 고정하고 어그러진 시선으로 세상을 폄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연수의 세계의 끝에 가 닿아 보기 위해서라도 계속 여행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