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 프루스트

우리는 삶 속에 포박당해 근시가 된다. 삶의 이미지를 제대로 굴절시켜 줄 광학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삶 속에 발을 담그고 있고 잊혀진 추억들과 잊혀진 사람들이 죽음 속에 갇혀 있다면, 소설가들은 삶과 죽음 그 가파른 경계를 유영하고 다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경계선상에서 두 세계를 흘낏 둘러볼 수라도 있는 그들의 얘기는 언제나 생경하고도 항상 익숙하게 들린다. 생경한 것은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이고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얘기들은 우리 안에 있었던 것들을 건져 올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완서, 이동하, 윤후명, 김채원, 양귀자, 최수철, 김인숙, 박성원, 조경란.
우리 시대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소설에 헌납했다. 언뜻 그들의 단편소설들은 소설적 장치를 빌린 자기고백서 같은 성격을 띤다. 소설집이 일종의 에세이이자 작가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록으로 치환되어 떠오르는 것은 소설적 허구의 한계를 깨고 도약하고자 하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같아 경이롭다. 이야기가 삶 그 자체로 용해되어 버린다.  

이 책의 제목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박완서의 표제작에서 왔다. 유년시절 작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본 노을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채색된다. 이는 이동하의 입을 빌어 한 생의 일몰에 대한 목격으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작가 둘이 해거름 풍경에서 조우한다. 해가 지며 주홍빛으로 풀어내는 그 아스레함이 애잔하고 처연한 것은 삶의 마침표,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적 풍경은 삶과 죽음의 현현이다. 유년기 작가 둘의 눈동자는 그것을 어렴풋이 체감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둘은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사물들과 자연현상들에서 삶과 죽음의 추상적인 화두들을 휘핑크림처럼 걷어낼 수 있는 재능은 글쓰는 자들만의 특권이자 업고이다. 윤후명과도 이 작가 둘은 교차한다. 전쟁에 관한 얘기다. 

우리에게는 도저히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전쟁, 전쟁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윤후명 <모래의 시> 중 

6.25의 경험을 공유하는 작가들은 저마다의 이향을 겪는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가 길 위에서 방황한다. 한 명(박완서)은 고향의 개념을 확장하여 사람 사는 곳으로 발을 디딤으로써 귀향의 과제를 완수하고, 다른 한 명(이동하)은 귀향 의지 자체를 포기한다. 이는 의미의 완성을 포기한 윤후명과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나름대로 귀향의 과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그들은 증언의 욕구를 달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을 쓰는 일로 연결된다. 자기 인생의 증언은 가장 절실하고 진실할 수 있는 작품의 소재가 되지만 그 함정 안에 웅숭그리고 있다 보면 그 자신도 청자도 모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소설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던 소재가 어느새 소설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대하지 못하는 하나의 한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것을 깨는 일은 이 소설가들이 영원한 과업으로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양귀자의 요절한 천재 화가 오빠의 얘기가 인상에 남는다.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난 오빠의 후배에게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은 셋째 오빠의 회상은 생을 견디어 나가는 것에 실패한 피붙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천재로서 기억되는데 드라마틱한 방점을 찍은 자살의 선택에 대한 근원적 의문과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이정표가 된다. 양귀자의 소설은 뜻밖에 최수철의 <페스트에 걸린 남자>에서 조언들을 얻는다. 죽음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의 만남을 목격한다. 자살충동은 기실 삶에 대한 강력한 욕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얘기는 양귀자의 오빠가 견디어 내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 아니라 삶의 분출하는 충동을 일상의 자잘한 고충들에 녹여내는 일이었다.

언젠가 사라질 시간을 지금 살아주고 있다고 여자는 느낀다. 현재를 살고 있다기보다 사라질 것이 분명한 시간을 살아주고 있다고 느낀다. 언젠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어 있을 시간을 살아주고 있는 사람들......-김채원의 <등 뒤의 세상> 

브라우닝의 시구처럼 현재는 과거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로 스러지는 길목에서 그저 시간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몸을 싣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음도 삶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명명한 하나의 참조점 이상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항시 망각하고 말아버리는 이 중요한 진리들을 문장 사이의 공백에 사려깊게 물려 놓은 작가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렇게 삶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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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0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서 읽고 있어요. 단편이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고 있는데, 양귀자선생님때문에 샀어요. 아주 오랜 만에 글 쓰셨다고하셔서 샀지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읽는 것이라서 약간 거리감이 있긴 했지만..... 근데 이야기삘은 많이 떨어지신 거 같았어요. 블랑카님 말씀대로 이동하의 작품이 결말이라고 생각해야겠네요^^

blanca 2010-04-08 22:46   좋아요 0 | URL
양귀자 좋아하세요? 그죠, 너무 오랫동안 안 나와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소설가가 소설을 안 쓰며 사는 삶은 어떨까, 하고. 그렇다고 안써지고 쓰기 싫은데 계속 억지로 쓸 수도 없고 원래 이런 구석에 관심이 많아서요^^;;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삶이랑 일상이 너무 궁금해져요. <모순>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4-09 09:44   좋아요 0 | URL
양귀자 선생님은 글 써서 성공했으면 그길로 문단에 몸 바쳤어야했는데, 엉뚱하게 음식점을 내거나 해서 그런데 많이 신경쓰시는 거 같아요. 도서출판 살림도 양귀자 선생님 부군이 운영할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처음 출판사 그만두고 차린 출판사가 살림이었는데..

전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불만이 많아요. 주제도 이야기도 소재도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게다가 이야기의 끈을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러니깐 양귀자 선생의 이번 단편 제목처럼 단절을 이어주어야하는데 그걸 못하더라구요. 장정일씨도 이번 구월의 이틀 실망했어요. 예전과 같은 에너지가 하나 없더라구요.

2010-04-09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9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