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엔들 잊힐리야 - 상 박완서 소설전집 12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박완서는 완독을 목표로 했을 만큼 좋아하는 작가다. 소설 사이 사이로 숨고르기처럼 내는 에세이의
구수함은 말할 나위 없이 좋다. 최근의 '친절한 복희씨'에서 그녀의 작품은 천천히 노년문학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년의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쓸쓸함과 그것에 단초를 제공하는 자식 세대들에 대한 섭섭함이
형상화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은 작가와 함께 걷는다. 전업주부였다 마흔에 등단한 그녀만큼 작품들은 하나같이
서두르지 않고 조곤조곤 얘기한다. 그 결 사이 사이에 스미는 여성의 감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유현하다. 

그녀의 작품을 대부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와중에 '꿈엔들 잊힐리야'가 왔다. 여느 그녀의 다른 작품들의
그 아기자기한 재미와 구수한 입씨름 대신 구한말에서 육이오 이전까지의 시대적 격랑의 틈바구니에서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찬 인간 군상의 처절한 삶이 개성의 풍속과 어우러져 드러난다. 예전 '미망'으로 드라마화되었던 작품이다.
개성의 거상 전처만의 돈에 대한 계율과 이부제 동생 태남을 물려받은 태임이라는 여인의 파란 많은 일대기다.
몰락한 양반의 자손이자 할아버지 전처만과 애증으로 얽힌 집안 머슴 종상이와의 결혼을 감행하는 그녀는
청상과부였다 역시 집안의 사내종과 부정을 저질러 태남을 낳고 우물에 몸을 던진 그녀 어머니의 이율배반의 삶에
저항하듯 자신의 삶을 스스로 쟁취하고 이끌어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자신과 유독 닮았으나
두번째 부인으로 가정을 꾸리게 되는 딸 여란 앞에서 결국 좌절하고 만다. 시대와 인습, 운명의 그 불합리와 부조리에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투항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의 얘기는 인간의 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하면서도 카리스마를 구현하는 데에는 약간의 마이너스를 감수하는 모습이다.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강인한 인간형을 여기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은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을 터무니없이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p.355(중)
개성만의 특색있는 풍속을 묘사한 장면들이 생생하고 재미가 진진하다.
태임이와 종상이의 혼례 장면은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풍속의 묘사가 그 생동감 있는 필체 앞에서
꽃처럼 생글거리며 피어난다.  

태남이의 독립자금을 대다 결국 발각되어 죽은 남편 종상이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죽어가는 태임의 모습이
얹힌 결말은 아릿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또한 그의 임종을 결국 지키게 되는 태남이와의 그 일상적인
대화가 오히려 더 절절하다. 이 결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아퀴를 제대로 짓는 법을 작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예술성과 서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한데 잘 어우러지게 묶은 그녀의 손속이 돋보였다. 

천상 이야기꾼인 그녀가 늙어가 더이상 그 보따리를 풀어 놓지 못할까 초조해질 따름이다.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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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9-12-30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완서 선생님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아직이네요.
마흔에 데뷔했다고.. 자기가 그 동안 논 게 아니라고 한번 화를 내셨단 얘기를 들었어요. ㅋㅋ

blanca 2009-12-30 20:57   좋아요 0 | URL
그 동안 논게 아니라고 ㅋㅋㅋ 저도 단편 위주로 읽어서 최근에 읽었어요. 참 재미있더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분권된 책들을 한 번 시작하면 생활이 피폐해져서. 정말 시간적 여유 있을 때만 읽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