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에 들어갔던 1,000억 상당의 대원각(당시는 요리집으로 개조)을 법정스님을 통해
기증하여 길상사로 바꾸게 한 김명한 할머니가 시인 백석과 한 때 청진동에서 함께 살며(동거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다)
사랑을 나누었던 김자야 여사이자 이 책의 저자이다. 그녀는 또한 나머지 현금을 백석 문학상 제정에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여 실제 문학상의 설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팔순이 되어서도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절절이 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애달파 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첫눈 오는날 유골을 길상사의 마당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그렇게나 평범함 속으로 녹아들기를 바랐던 사랑의 결실을 꿈꾸며 떠난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백석과 만나 보낸 3년 여의 시간은 아름다웠고, 신분의 차를 둘러싼 봉건주의의
한계로 서글펐다. 청진동에서 둘이 보낸 시간들에 대한 회상은 노인이 노인으로 태어났을 것이라는 그 젊은이들의 무지렁이 같은 오해를 한숨에 씻어내고도 남을만치 영롱하고 아름답고 상쾌한 사랑들이다.
이후 그녀가 죽는 그 날까지 이 사랑은 그녀가 회상하는 과거의 시간들의 갈피짬마다 속수무책으로 스며들어 그녀 인생 전체를
관통한다. 과거회상밖에 할 도리가 없다는 그 주어져 넘쳐 버리는 시간들 속을 뚫고 들어오는 기억들은 거기에서 정지하여
수만번 다시 쓰이고 또 다시 쓰여 새로운 결말로 다시 태어나려 몸부림친다. 그녀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백석이 만주 신경으로 떠나던 날 끝내 따라가지 않은 자신의 결정과 그가 쉽게 찾지 못할 거처를 따라 이리저리 헤매인 그 무용의 노력을.
하지만 자야 여사가 죽는 날까지 백석을 그리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덕택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설명이지만 완결되지 못하고 묶여서 사회적 합의의 틀 안에 부려놓지 못한 사랑이야말로 기억 속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의 권좌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랑이 가족이라는 성과물로 치환되고 노년 서로 등을 긁어주는
안온함으로 변모되었을 때도 우리는 사랑 그 하나로 하루를 온전히 채우며 감정의 후달림에 전율할 수 있을까?
설명되지 않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된다. 개개인에게.
손 한 번 제대로 흔들지 못하고 떠나 보낸 그 아이는 영원히 첫사랑의 눈동자가 되어 나를 흔드는 것이다.
그것이 지순한 사랑의 결정체라고 미화하고 또 기만해도 그건 나의 삶을 그럴 듯한 것으로
격상시키고 싶은 치기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백석시인과 자야 할머니의 사랑은 하나의 화석이 되어 문학사에
스며들어 많은 사람을 흔드는 질료가 되어 버렸다. 이루어졌다면 못들을 얘기들이다.  

사랑을 회상하며 떠나가는 사람의 얘기를 백석의 시전집을 간행한 이동순 시인이 다듬고 엮었다.
자야 여사의 삶처럼 처연하면서도 값어치 있는 아름다운 사연들이다.
오버코트 속에 작달만한 그녀를 쏘옥 넣고 마구 줄달음 치는 백석을 상상하며 그들의 웃음소리가 가르는 찬 공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주변 자체가 청명한 차가움으로 상쾌해진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얘기를 듣는 일은 언제나 싫증나지 않는 낭만적인 유희이다.
눈이 오는 날 가까운 길상사에 가서 자야 할머니의 흔적들을 도닥거려 주고 싶다.
영롱하지만 가냘펐던 그 사랑과 곡절이 많았지만 사회적 기여로 승화 확대된 삶의 결말이 꽁꽁 얼어 있는 그 마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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