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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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갑자기 지독한 비관주의자에서 무모한 낙관주의자로 변신했다.
특정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갑자기 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고, 비관주의로 허비하기에는
나를 흥분시키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읽어야 될 책이 아직 많이 남았고
주문해야 할 인터넷 쇼핑 품목이 산재하는 한, 나는 사는 것이 좋다.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궁극의 것이고, 또 그것이 삶을 빛나게 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있는 치기는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십대에서 종료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비관주의자가 멋있어 보이고,
삶에 대한 통찰이 더 있어 보였던 그 암울한 시기(나는 이 시기를 후회한다)는 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한
역설적으로 증발해 버린다. 왜냐?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아주 사소한 일들에 방방 뛰는 아메바가 되었다. 이 성향은 타고 난 부분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스무 살때 비관주의를 가장했던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화되어있다는 이론도 있지 않은가. 반면 행복을 느끼는 것도
연습하여 체화할 수 있다는 이론이 있고 그 이론이 너무 좋아서 행복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긍정심리학은 최근들어 각광받고 있는 분야로 마틴셀리그만이 창시자이다.(그의 '긍정심리학'은 아주 재미있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는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의 저서이다.
제목인 <Stumbling on Happiness>가 인상적인데 이 책은 주로 행복이 미래를 지향하면서 상상하는 감정인 점에 주목,
그것에 얽힌 아주 고약한 함정을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론적인 얘기라기보다는 인간이 끊임없이 왜곡하여 기억하는 과거와, 굴절된 현재의 지각과, 비합리적인 미래에 대한 상상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보여준다. 
요컨대 내가 나에게 속고 있다는 얘기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 이 부분이 대부분 변형되고 왜곡된다는 것은 유아 심리학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동생과 유년기의 기억을 나누다 보면 서로 수정해주고 보완해 주어야 대목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적어도 나의 기억이
항상 옳다고 신념처럼 믿어온 부분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경험들은 저장을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실마리로 축소 압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경험을 기억하고자 할 때, 뇌는 그 경험을 실제 그대로 복원하지 않고 압축해놓은 정보 덩어리를 재조합한다.
이렇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고, 때로는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여겨지는
책들이 갑자기 생경스럽게 느껴진다. 거짓말, 혹은 허풍덩어리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우리의 지각도 만만치 않다. 심리학자 조지 밀러는 "뇌의 가장 특출한 지적 성취는 바로 실제 세계이다."라고 했다.
시각의 맹점 지점을 우리는 부지런히 채워넜는다. 그것은 왜곡이다. 눈앞에 놓인 사물들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새로운
실제 세계로 재창조된다. 이것이 현재에 대한 인식을 이루고, 또한 이런 현재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고,
미래에도 이와 유사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순환적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은 현재의 경계를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동시에 지각을 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면서 경험하는 정서는 사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의 감정이 몹시 상하면, 심리적 면역체계는 사실을 조작하고 비난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 등을 동원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도록 해준다고 한다. 
이 논리는 아주 재미있는 것이 상대가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방어체계가 작동하여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자잘한 짜증거리를 안겨다 주면 오히려 용서가 안되는 경우를 설명해 줄 수 있다
는 데에 있다. 심리적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의 경미한 부정적 상황이 오히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나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한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일 남편이 양말을 뒤집어 빨래바구니에 슛팅을 시켜도 방방 뛰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얘기이다. 알면 극복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 말이다. 이는 또 미래에 아주 힘든 역경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현재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큰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의 계획이나 목표가 좌절되면 나는 무너질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럼에도 충분히 자잘한 만족들을
얻으며 생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와 다름아니다. 그리고 불쾌한 것을 경험할 때 재빨리 합리화하기 위해 설명하는 그 행위가 바로 '글쓰기'임을 지적한 것은 아주 도발적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설명하는 행위는 유쾌한 사건의 영향력도
감소시킨단다. 시인 존 키츠는 위대한 작가들이란 "불확실성, 미스터리, 그리고 의심 앞에서 굳이 사실과 이유를 찾아나서지
않는 여유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절반의 내용에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
이라고 적고 있다.
 

결론은 사실 약간 힘이 빠진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된 미래에 대한 상상하기를 당장 멈추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 곳은
잘난척하는 나이든 이모일 수도 있고 참견쟁이 친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저자가 이렇게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우리 감정을 예측하기 위해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을 회상하거나 혹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일' 어떻게 느낄지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들여다 보라는
권유는 오지랖 넓은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으로
남에게 충고하거나 조언하기를 즐기는(나를 포함) 사람들에게서 더 굴절된 정보를 얻기 쉽다고 생각한다.
"I"메시지에 익숙하고, 대체로 자신과 상황을 설명하기를 즐기는 서구 사회에 맞는 방법이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일군의 심리학자들의 번역이 유려하고, 작가의 재치와 상황에 맞는 유머가 버무려진 뇌생리학적 설명의
진귀함만으로 충분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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