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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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떴는데, 그녀는 그 눈빛에서 아침에 보았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우수였다. 그녀는 그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녀의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서재를 나와 그녀의 방으로 가서 고개를 작업용 탁자에 떨어뜨린 채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잠시 두었다. <중략> 

그러나 이제 슬픔 자체가 되어버린 여자는 무릎을 꿇고 이 내방객들의 숨소리를 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중략> 

아,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야 하나.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교보문고에서 서서 '죄와 벌'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친구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한 원죄가 섞인 기억만 있을 뿐, 별다르게 그 작품에 대한 감동도 기억도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고등학교 때 노총각 문학 선생님이 약간 변태스러운 눈빛(우리들은 대체로 그렇게 느꼈다)을 번득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위대함을 강변했던 기억 정도가 덧붙여질 수 있겠다. 그는 줄치며 읽는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고 몸을 떨며 외쳐댔었지. 그 후로 그 선생님과는 별개로 줄치며 읽어야 하는 그 소설에 대한 일종의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줄곧 따라다녔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의무감이 그 작품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결론은, 아직 그것을 읽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절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소설은 픽션과 사실이 혼재하는 메타픽션 장르라고 한다. 그 기법이 대단히 도발적이고 문체가 세련되서 전문적으로 소설작법을 치열하게 공부한 작가의 작품인 듯 보이나, 기실은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설을 출판해 보지 못한 치프킨이라는 불운한 작가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의사이다. 20세기의 작가(화자)는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 안에 앉아 재혼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페테르부크를 떠나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는 여정에 3인칭 시점으로 동참한다. 이 경계는 굉장히 모호해서 작가의 자전적 얘기와 페쟈(도스토예프스키의 애칭 이하)의 얘기가 혼재되어 흔히 말하는 '서술의 일탈'(해설 인용)을 노출함에도 그것은 어떤 오류로 보인다기보다는 몽환적인 시의 잔영을 떨치는 듯한 마력이 있다. 이것은 나의 얘기, 저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얘기라고 친절하게 구획을 지어주는 대신 그는 끊임없이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왕복하면서 어쩌면 그 둘의 삶을 의도적으로 섞어 버린다. 이런 서술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의도적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치프킨의 유대인을 경멸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경배의 노래는 이렇게 둘의 비애어린 삶을 결국은 한데 뭉뚱그림으로써 완결되었다고 보여진다면 무리일까.  

페쟈의 여정은 그의 다혈질적이고 나약한 성격에서 비롯된 도박에의 중독, 간질발작, 러시아의 주류문단에 대한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노, 거기에 더한 안나에의 집착어리고 열등감어린 애정들이 사물과 사건들에 투영되는 과정이다. 수전 손택은 무엇보다 이 여정이 부부애로 집약된다고 결론지었는데, 페쟈의 속기사로 들어왔다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된 안나의 유약한 성격과 남편의 파멸에의 은근한 방관자로서의 모습은 무언가 아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비애가 서려있는 것이며,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판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녀의 옷가지까지 저당잡히는 페쟈를 그저 울면서 지켜보는 이 여인의 모습은 앞서 인용한 폐자의 임종 앞에서 슬픔 그 자체로 화한다.  

모스크바의 박물관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며 주위의 경악어린 시선을  끌어모으는 페쟈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화랑의 방문객들이 앉아서 쉬거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는 다른 의자들과는 달리, 왠지 거기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의자는 화랑의 직원을 위한 것이거나, 어쩌면 의자 자체에 뭔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페쟈는 뻔뻔스럽고 터무니없게 그 의자에 척하니 두 발을 올려 놓고 직원이 제지하든, 또 거기에서 파생되는  어떤 굴욕감이든 이겨내고 그 한계를 넘어야 했다. 그것은 폐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다수의 관념, 그것에서 파생된 관습, 그 관습이 만들어낸 말, 말, 말. 상징적으로 소묘된 이 대목은 그 내포한 많은 의미들을 차치하더라도 페쟈의 귀여운 오기가 상상되어 웃음짓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상상해 보라. 머리가 까진 중년의 눈이 퀭한 남자가 갑자기 푹신한 안락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번쩍 올라가 고작 그림을 열심히 보고 있을 모습이라니. 

옆의 그림이 페쟈가 그렇게 쇼를 하며 감상한 그림이고 죽기 얼마전 지인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 생각해 복사본을 선물하고 지금까지 그의 임종을 맞은 그 소파 위에 걸려있다. 

사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상징과 페쟈의 선호를 연결지어 분석할 만한 지적 소양이 없기에 그저 이 그림을 들여다 보고 그가 임종 직전에도 무신론적 삶과는 달리 복음서를 애타게 찾아 안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사실과 견주어 그가 신을 조롱할 거리를 찾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서두에 인용한 페쟈의 죽음 대목이다. 안나는 페쟈가 그녀에게 어렵게 구해줘 함께 먹었던 포도를 그 때 그처럼 어렵게 구해 그의 입 안에 한 송이 한 송이 넣어주며 그의 회복을 염원한다. 마치 그 한 송이 한 송이에 생명줄이 달린 듯이 눈물을 목 안으로 넘기며 그랬을 안나의 환영이 떠오르고 페쟈의 거친 숨과 계속되는 각혈로 물들은 목언저리의 피들과 그리고. 그리고. 또 눈물 흘리는 나. 그는 알았을까? 평생을 빚과 도박과 따돌림과 간질로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그렇게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을 줄을. 또 그는 알았을까? 이렇게 폐자의 궤적을 따라가는 쓸쓸한 여정을 그 어떤 지원도 없이 홀로 치루어 냈던 그의 책이 결국 사후에 발간되고 문단의 극찬을 받았을 줄을. 결국 이 둘의 삶은 하나인 것이다. 현실적 한계를 딛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냄으로써 지고의 진리에 합치되는 그 지점에이 처절한 희구. 그것은 둘 다 공교롭게 사후에 완결된다.  

수전 손택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극찬했던 이 유명하지 않은 소설에 나는 지극한 찬탄과 감동어린 눈물을 바친다. 그리고. 페쟈의 예술을 대가로 처절하게 휘저어진 정돈되지 못한, 정당화되지 못하는 그의 삶에도 후대의 독자들을 대신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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