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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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생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에 때로는 내가 관찰자로서 때로는 내가 당사자로서 반응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 현상이 무관할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당사자가 되었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을 때에는 그저 그 현상이 나의 개인에게 미치는 소소향 영향에 질식하여 질질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 현명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을 책으로라도 해야 그나마 생의 마감 시점에 적어도 인생에 속았다는 열패자로서의 늦은 자각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늦었지만 행운이었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수전 손택을 자신의 글들에 때로는 어설프고 조악하게 덧붙이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서 브랜드화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조금은 높아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그녀가 그렇게나 거부했던 이미지화와 왜곡된 은유의 중심에 때로는 그녀가 놓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이 실제 암을 두번이나 극복하면서 암에 비대하게 덧붙여진 사회의 잔인한 은유에 저항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 출판된 것은 후에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면서 후기 형식으로 덧붙이려고 하다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저작이 되어 버린 <에이즈와 그 은유>와의 합본이다. 사실 그녀는 이 둘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과 관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는 것 또한 한계라면 한계이겠다. 또한 그녀는 이 둘이 문학적 성과물로 평가 받기를 바랬다고 하나 이 저작이 과학적 분석물로 평가 받은 부분에 대하여 무척이나 기분나빠했다고 한다.

일단 이 책이 그녀 자신의 암극복기에 대한 얘기가 될 거라 기대했다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부분에 묘한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구나 적당히 관음증이 있어 그녀가 암을 극복하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에 대한 내밀한 스토리가 조금은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 이런 자신의 스토리 개진을 지양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례들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감정의 배설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한 점 등은 이 책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꼭 사서 줄 그으며 읽고, 더불어 수많은 도서 목록까지 옆에 두고 메모해 두어야 할 만큼 진지하지만, 문체의 세련됨과 지적 편력의 고귀함이 책 전체에 흩뿌리는 고상함은 아름답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재미도 있다는 얘기. 그녀가 아름다운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이미지가 환영처럼 주위를 에워싼다. 

요는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는 점과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또한 이런 속박의 대상질병으로 19세기까지 결핵이, 그 이후로는 이, 더 이후로는 에이즈가 지목되었다. 결핵은 시간과 관련된 질병으로 삶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게 하여 그것을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키는 낭만성을 가지고 있다고 은유화되었다면, 암은 공간의 질병으로 지형학적으로 은유화되었으며, 육체의 질병이다. 암은 별다른 이해력이 없는 세포들이 증식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로 대체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면역학자들까지도 신체의 암세포를 비자아로 표현한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라도 걸린 듯한 이 세계를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데에 암의 은유는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 결핵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따라다녔던 한다발의 은유가 산산이 쪼개진 채 광기와 암의 두 가지 은유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그녀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들과 동일시되가 마침내 이 공포들이 다른 것들에 부과되어 형용사적 어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암을 묘사하는 지배적인 은유는 전쟁의 언어로서 그녀가 가장 끔찍해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실지로 그녀는 반전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당 부분의 헤게모니가 사실은 군수 산업과 전쟁을 통한 민중의 압박 및 공포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름끼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만 인지하고 다수의 대중은 그것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유린당해도 스스로는 주체적으로들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의 서두에서 그녀가 내리는 은유의 정의가 날카롭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느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중략> 

   
 

내 책의 목적 또한 이런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이루려 노력했던 일종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뭔가에서 의미를 빼앗는 것, 극히 논쟁적인 전략을 활용해 돈키호테 마냥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은 그녀의 질병으서의 은유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미를 빼고 해석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 은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  

에이즈는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동성애자, 혹은 난잡한 성교자로서의 낙인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나쁘게 감염되었을지라도 그는 아주 불쾌한 징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또한 국가와 언론이 종말론적 사고와 그것의 전파에 탐닉하는 현상을 두고 최악의 각본을 애호한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공포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해 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작금의 신종플루 유행에 대처하는 한국 언론들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 공포에 대한 허구의 통제력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질병들로 인한 세계의 종말론까지 확장된다. 백지 상태의 출발, 이것은 강대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는 과감성을 보이지만)의 대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대한 탐욕의 음모와 다름 아니다. 즉 사실 질병으로서의 은유 그 자체가 과학적 설명의 부재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대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이재원의 번역도 유려하고 그가 말미에 덧붙인 도서 목록도 아주 유용하다. 그녀를 시작하기에 가장 그녀다운 문체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입구에서 질식하여 그녀를 탐험하는 것을 저어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은 대중의 치졸한 관음증을 조망한 책 <타인의 고통>을 보고자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수동적으로 치여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녀는 아픈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질료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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