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일송세계명작선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순진 옮김 / 일송북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체호프의 단편선은 사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서 인용된 <대학생>의 한 대목이 너무 훌륭했고, 현대의 잘 나가는 단편작가들이 사실은 다 그의 아류들이 되고자 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들에 혹해서 읽게 되었다. 

기대이상이었다. 재미없을 줄 알았다. 일단 번역의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지점은 흥미유무의 판단의 경계가 되버리는 문제가 생기므로. 즉 허술한 번역은 반드시 흥미를 감하게 되어 있다. 어느 리뷰어가 번역자 김순진이 역시 체호프가 다닌 모스끄바 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로서 그 번역이 정말 탁월하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그 리뷰어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았다. <티푸스>에서 티푸스에 걸린 젊은 중위를 치료하러 온 의사의 말투에 대한 그녀의 표현은 비극적인 소설의 희화화가 어떻게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거럼! 거럼! 거럼!", "거렇지,거렇지......좋아요,총각. 기운을 놓으면 안돼!" <<중략>> "화내면 안 되죠...... 거럼! 거럼! 거럼!"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농부들>과 <골짜기>와 <약혼녀>는 분량과 스케일이 중편이다. 특히나 <농부들>과 <골짜기>는 근 현대의 러시아의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리얼리티와 서사의 다이나믹함이 대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나 배경 묘사에 치중하는 정적인 어휘 놀음이라기 보다는, 문장 하나 하나가 주인공을 여러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삶을 앞으로 흐르게 하는 서사 중심이어서 지루할 새가 없다. 단 <굽은 거울>이나 <자고싶다> 같은 작품은 이런 서사에의 치중이 개연성없는 결론과 합쳐져 작위성이 조금 도드라진 무리수는 있다. 그는 감정의 표현을 섬세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하는 대신에 주인공을 한 번 더 움직이게 하거나 배경을 변화시켜 부지런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방법을 쓴다.  

기억하고 싶은 작품은 삼류 작가 이반이 가족들에게 위세 떠는 글쓰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묘사가 돋보였던 <쉿>과 열세 살 어린 유모가 주인집 아기를 돌보면서 졸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는 <자고싶다>, 대학생들의 집을 떠돌며 그들을 수발하며 존재감 없이 슬프게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의 얘기인 <아뉴타>, 한 사내가 모스크바에서 병을 얻어 귀향해 가난한 대가족 농가의 삶에 합류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부들>이다.  

뇌수 속에 콕콕 박아 넣고 싶은 대목들은. 

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의 시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슬픔> 

그는 네 시까지 더 쓴다. 쓸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여섯시까지라도 썼을 것이다. 혹독하고 비판적인 눈으루보터 벗어나 혼자서,생명이 없는 사물들 앞에서 부리는 아양과 거드름이, 자신의 힘에 운명이 달린 작은 개밋둑 앞에서 부리는 전횡과 교만이 그의 존재에 소금과 꿀이 된다.<쉿>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들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학생>  

이 표현이 바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 인용된 표현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파르르 떨리는 사슬의 끝이 보이는 듯한 이 표현. 추상적인 개념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시각화될 수 있다니. 

졸다가 깜빡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건드리거나 볼에 대고 숨을 내쉬기라도 하면 금세 잠이 달아났다. 몸이 마비라도 된 듯이 늘어지자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온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가난과 사료와 값이 오른 곡물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우울하고 지겨운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인생은 이미 지나갔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농부들>  

아, 잠들려고 전전반측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 누울 때 사람들은 거대한 인생의 숙명을 생각했다 손에 집히는 자잘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하며 세상 제일가는 철학자에서 좀스러운 생활인으로 진자처럼 왕복한다. 이런 통찰력이라니! 

다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그러나 가족들 모두 언제나 잠을 잘 못 잤다. 성가신 일이 집요하게 모두의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노인은 등이 아파서, 할미는 근심과 악의 때문에, 마리아는 무서워서, 아이들은 가렵고 배가 고파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농부들>  

나도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이 상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노파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어쩐지 어렴풋했다. 머릿속 모든 생각들이 뒤죽박죽이어서, 죄악과 죽음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일상의 근심거리들과 가난에 마음을 빼앗겨 방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리고는 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공포심이 들 때에만 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농부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농부들>

이 여인과 2층 방에서 함께 살게 되자 온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새 유리를 끼워 넣은 듯이 환하게 밝아졌다. <골짜기>  

아, 이런 표현은 체호프만 할 수 있겠지. 

태양은 어느덧 빨간 금란으로 침구에 싸인 채 깊고 평화스러운 잠에 빠져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빨강과 보랏빛으로 물든 가늘고 긴 구름이 그 고요하고 편안한 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짜기>  

한 편의 시 같은 대목.  지금까지 노을을 묘사한 표현중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런지.  

고전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한 번에 깨버린 이 책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진부한 근거를 머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그 질긴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그저 넘기는 책장의 속도로 대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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