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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어찰첩 (보급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9년 5월
평점 :
요는 정조독살설의 반증으로서 이 어찰첩이 근거가 되느냐가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었던 듯 싶다. 주류 역사계에서 노론 벽파에 의하여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굉장히 거슬리는 것이었을 테고, 때맞춰 나온 이 어찰첩에서의 정조와 노론 벽파계 수장 심환지의 밀담은 그것에 정면 배치된다고 이슈화되었던 듯...대중적 지지도가 있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주장은 이 어찰첩이 결코 그것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정조 사후 심환지의 일련의 정치적 활동들이 정조 정책을 완전히 정복시키는 것이었음에 주목한다. 나의 의견은 알면 알수록 미궁이라는 것이다. 정조 건강의 악화와 또 주고받은 수많은 어찰이 과연 심환지가 정조의 정적이었냐는 물음에 명쾌한 예스를 던져 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고, 섣불리 이런 일련의 것들을 이슈화시켜 정조를 평가하고 노론과의 관계를 예단하는 것은 경솔하다는 생각이다.
일단 이 책 굉장히 어렵다. 난무하는 한자어와 전후사정 설명없는 서간문이라는 점에서 영어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비애가 오히려 이 서첩 앞에서는 호사로운 것으로 폄하된다. 융단폭격처럼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유학경전 인용문, 그리고 모든 한자어들이 이 매력적인 정조의 서찰을 참으로 딱딱한 것으로 변질시키지만, 정말 신기한 것은 은근 아주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냥 대충 해석해서 사건을 구상해도 정조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때로는 부드러운 정감어린 그 속살이 흥미의 맛깔스러운 조미료를 뿌려준다는 것! 그래서 한자어에 대하여 자신감있는 사람, 정조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역사서적보다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라는 인상이 든다.
막후정치... 상소문 초안도 잡아주시고 은근히 소문도 염탐하고 누구는 칭찬하고 누구는 막 비난하라고 하시고 물러가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고 하시고 ^^ 원래 생각했던 정조와는 조금 많이 다른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가 노론 벽파와 대척의 극단에 서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정치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며 그 긴장감을 조절했다는 부분에서는 노론에 둘러싸여 외롭게 투쟁하다 독살당했다는 시나리오 구상이 조금 빈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환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굉장히 복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 호통치는 부분이 여러 군데 등장하고 희화화 하는 부분 등과 한편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소식을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는 부분, 심의 건강을 걱정하는 부분 등이 아주 어려운 모자이크를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한다는 것. 따라서 이 서찰만으로 정조가 심환지를 자기 편으로 여기고 총애했다고 예단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내칠 수 없는 벽파계의 수장으로 어장관리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슬며시 든다.
정조의 애민은 절절하다. 군데 군데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 농사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고도의 정치적 책략가로서의 그의 면면의 노출을 감싸고도 남는다. 군주가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통치의 과정은 어떻게 백성에게 도달할 것인가? 정치를 도외시 하는 것이 그 지도자가 순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의 근거인지는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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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좋은 비다. 어찌 이처럼 기쁘고 좋은 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질까봐 감히 기쁘다느니 좋다느니 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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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을 지지, 혹은 방관했던 노론 벽패 대신들에 둘러싸여 고도의 정치적 능력으로 정사를 펼쳤다. 때로는 그들을 다독이고 때로는 그들을 호통치며... 감정적인 적들을 통치의 큰 틀 안에서 포용한 그의 능력은 대인의 것이었으나, 한 인간으로서 한 아들로서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죽는 날까지 주위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해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지 못한 그의 고독과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와 그것을 방조한 어머니를 섬겨야 했던 그의 처절한 딜레마는 그럼에도 백성을 가슴깊이 사랑하고 어루만졌던 그의 애민과 어우러져 장대한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