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대 중반 아버지는 이제 자주 사후 당신이 묻힐 곳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린다. 사후 당신의 영혼이 안식을 찾을 곳을 찾아 헤매며 육신의 죽음을 넘어선 그 이후 흐를 시간을 당연한듯 전제하는 모습에 나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종교가 없는 아버지는 그럼에도 영혼과 넋에 대한 믿음이 있다. 고인을 기리고 추억하며 각종 의례를 지내는 일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죽음 이후라는 가정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도 내 죽음을 떠올리면 아득한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그 공포를 잠재우는 건 산란한 일상 빼고는 없다. 즉, 나는 내 호흡이 멈추고 육신이 부패하고 남을 그 뼈의 운명에 대해 불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 남는 것이 있다면, 죽음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답을 영영 알지 못한 채 나는 죽음으로 건너갈 것이다.



이 도발적인 제목은 누구나에게 공명하는 한탄이기도 하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종교적 믿음이 신실하다고 해도 죽음 너머 남을 뼈의 운명을 확신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17세기 의사이자 산문 작가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영국 노퍽주 들판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한 수십 개의 유골 항아리들을 시작으로 죽음과 장례, 매장, 화장 풍습들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삶에 익숙해지며 결코 적응하지 못할 허무한 결말인 죽음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러니임을 설파하는 브라운의 문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경탄과 닿아 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설교자"이며 동시에 독자를 "비범한 사색의 비상으로 이끈다." 허무론자 같으면서 동시에 삶의 찬란한 불꽃을 찬탄하는 그 아이러니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삶은 순수한 불꽃이며, 우리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태양에 의지해 살아간다. 살아생전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작은 불씨 하나면 충분하지만, 죽음 뒤에는 아무리 거대한 불길도 인간의 허영을 채우기엔 늘 부족해 보인다.

-pp.124


그의 사후 벌어진 웃지못할 해프닝은  그 자신이 쓴 이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에 덧붙여질 텍스트가 된다. 19세기 중반, 근처 무덤 작업 중 드러난 브라운의 두개골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출되어 병원에 전시되었다 다시 원래 무덤에 안치된다. 그의 뼈는 만인의 전시 대상이 될 운명이었을까? 그 정도로 아무도 우리 사후 벌어질 일에 대한 통제권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방증 같기도 해서 씁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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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8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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