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관점의 양 극단에 선 책을 읽었다.
제목만 봐도 두 책이 대척점에 있다. <인간의 비참>과 <가치 있는 삶>. <인간의 비참>의 저자인 데이비드 베너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 교수로 소위 반출생주의자다. 말 그대로 비참한 존재이자 필멸의 소멸을 품고 있는 인간을 재생산하는 출산을 일종의 생식적 폰지 사기로 보고 있다. 삶의 큰 질문,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에 제한된 지상적 관점에서 그럴 수는 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는 단호히 그 어떤 의미도 없으며, 이런 곤경이 삶뿐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 소멸인 죽음에도 있다고 단언한다.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만, 죽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망 없는 존재를 세상에 퍼뜨리는 출산 또한 나쁘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진실은 종종 추하다.'의 그의 이 '인기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철학을 듣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비관이 아닌 끈질긴 낙관주의다. 그러나 이 낙관주의가 때로 책임 없는 모호한 환상이나 기만일 경우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통과하여 결국 비존재로 간다. 지금 내가 '내'가 가진 것이라 느끼는 소망, 의지, 꿈, 추억도 결국 존재의 소멸로 종결된다. 이 덧없음을 직시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비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가 그간 묻어두거나 간과했던 이런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환기하며 퇴장한다. 이미 존재함으로써 겪어야 하는 생래적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불필요한 일들이었다.
<가치 있는 삷>은 <인간의 비참>보다 훨씬 전에 읽은 책이다. 저자 마리 루티는 정신분석학자 줄리 크리스테바의 제자다. 마치 <인간의 비참>에 대항하듯 이 삶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위대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삶의 덧없음은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드높인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덧없음을 사랑한다는 의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불가지론과 불가사의함은 삶의 신비를 드높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의미로 통합될 수 있다는 '끈질긴 낙관성'을 견지한다. <인간의 비참>의 데이비드 베너타라면 분명 이 저자가 순환론적 오류에 빠졌다 비판할 지점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에는 의미가 있으니까.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나? 살아내면 안다. 논리성 앞에서 선 삶은 허술하다.
이 모든 인간적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면, 어떤 심원한 우주적 의미가 있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다. 의미가 있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으니 실존적 불안을 안고 견뎌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 존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소멸로 간다.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침범할 수 없는 생의 자기 보존 의지는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