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역사는 승자 독식이 되기 쉽다. 승자의 언어와 승자의 시선과 승자의 해석이 사실을 직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사료 고증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고 폄하되고 없었던 허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이미 한일합병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청년들을 상상해 본다. 독립된 주권 국가가 아닌, 일본의 지배하에 태어나고 일본어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했던 세대가 일본의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되어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하면 과연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설사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은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강요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결백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이 책은 1942년 8월 부산항을 떠나 남방에서 오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최영우의 이야기를 외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최영우는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 및 자카르타 인근 형무소에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구금된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만 피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전범 행위에 협조한 셈이 되는 이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러운 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놓였다. 왜 기꺼이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은 너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윤리적인 질문과 생존은 충돌한다. 생존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저돌적으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상충되는 지점에 놓일 때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존을 택했다. 그리고 손자는 그의 선택 아닌 선택과 그것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담담하게 복원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그 비애는 사는 일이 그런 참혹한 선택의 기로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 의지보다 시대 상황과 주변의 여건이 엄청난 위력을 행사할 때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최영우는 친척이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돌아온다. 이후의 그의 삶에서 이전의 그가 가졌던 희망, 활기. 꿈들은 돌아올 곳을 찾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없다. 어쩌면 가졌을 내일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회한조차 손자는 알 길이 없다. 손자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세상 바깥으로 마침내 들고 나온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숨기고 싶을 수 있고 잊고 싶기도 한 이야기들도 이 세상에 자리가 있다. 역사는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로 균형을 이룬다. 그들에게 걸맞는 언어와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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