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4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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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 신봉자였다. 어떤 상황이라도 고정 불변의 자아가 있고 선한 사람은 일관되게 선한 결정을, 악인은 모든 분야에서 나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의에 앞장서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습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복잡다단하고 욕망에 취약하다. 어떤 상황은 사람을 망친다. 이 기본 전제를 알지 못하면 인간사를 읽을 수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그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그 사람의 가장 이기적인 본성을 끌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당신도 모두 어떤 극한 상황에서는 정말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문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작가로 나는 에밀 졸라를 꼽는다. 에밀 졸라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극한을 뚫고 더 나아간다. 그는 이상주의를 비웃는다. 아름다운 정서적 교감, 인간에 대한 신뢰는 에밀 졸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그가 구현하는 세계 속 인간 군상은 욕망 앞에서 나약하고 잔인하다. 돈 앞에서 부모를 죽이고 형제에게 낫을 휘두른다. 


펄벅의 <대지>와 같은 제목의 이야기는 그것과는 결과 차원 자체가 다르다. 에밀 졸라의 대지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혼재되어 있다. 인간은 그것의 생명성과 위대함에 기꺼이 굴복하고 위안을 얻기도 하고 그것을 물화하여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없이 휘둘리는 비극적 재화로 축소 치환해버리기도 한다. 13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부동산에 대하여 가지는 모순적 욕망과도 겹치는 부분이다. 푸앙 가문의 땅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삶의 그 비루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처절한 애착과 얽혀 거대한 인간들의 욕망의 지형도로 완성된다. 


<대지>의 출발은 가볍고 상쾌하다. 우르두캥의 농장의 목수로 일하는 젊은이 장이 푸앙가의 소녀 프랑소아즈의 암소의 교미를 돕는 에로틱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윽고 푸앙 영감의 재산 분배를 둘러싼 세 남매의 갈등의 장면으로 나아간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가 흔히 그리는 일상적 풍경과 다르다. 남매는 아버지와 자신들이 받아낼 유산을 분리하지 못한다. 부자, 부녀 관계는 철저히 돈에 의해 움직이는 역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그려진다. 노인은 짐짝처럼 자녀들 집을 옮겨다니며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둘도 없는 자매로 서로 허리를 감싸 안고 다녔던 자매 리즈와 프랑소아즈의 관계도 푸앙가의 탐욕스러운 뷔토를 가운데 두고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에밀 졸라는 그를 둘러싼 자매의 연적 관계를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린다. 가족 간의 사랑이나 신뢰는 마치 개나 줘버려, 하는 졸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정신없이 타작 일과 그 소리에 빠져 더 힘차게 두들겼다. 바로 그때 저녁 외출 허가를 받고 방문한 장이 그들을 보았다. 그는 갑자기 질투를 느꼈고, 마치 불륜 현장을 적발한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열기를 뿜으며 헝클어진 모습으로 제때에 제자리에 주거니 받거니 도리깨질을 하면서 그 뜨거운 일을 함께 하는 두 사람은 밀 타작을 한다기보다 차라리 아이를 만드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pp.351


형부와 처제의 밀 타작 장면은 에밀 졸라만이 그려낼 수 있는 농염한 색깔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으면서도 성적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곳곳에 드러나는 각종 근친상간적인 장면들은 지금으로서도 파격적인데 19세기 당시의 반응은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고전이 가지는 경직성과 구태의연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 책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다. <대지>를 보면 에밀졸라가 통속적 재미와 작품의 깊이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보기 드문 작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푸앙 영감의 비극적 종말은 그가 하려던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었다. 


흩날린 씨앗들이 파종꾼들의 손에서 벗어나 금빛으로 주변에 떠도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그러다 파종꾼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면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씨앗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파종꾼들을 에워싼 모습이 멀리서 빛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pp.633


지독한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내는 작가라니...끔찍한 파멸 뒤에 떨리는 빛을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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