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되었던 시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도 하고 한계가 되기도 한다. 영영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서 타국에서 나이들고 죽는다는 것은 감히 함의를 추측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게는 거대하게 느껴졌다. 스리랑카에서 인도에서 러시아에서 이탈리아에서 각자가 떠나온 사연은 각각 달랐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고향의 기억에서 어느 정도는 놓여나지 못했다. 모두가 고향을 등에 업고 왔다. 

















제발트의 소설은 언뜻 소설 같지 않고 르포 같다. 화자는 이야기마다 신뢰가 가는 청자이자 기록자로 동시에 기능한다. 심지어 마치 기록 사진 같은 자료들이 삽화로 수록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그러다 종내는 이 모든 이야기가 절대 허구일 리가 없으며 제발트 자신이 직접 취재한 사람들의 연대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제발트 앞에서 호기롭게 허물어진다. 아니, 이 모든 이야기가 다 허구일지라도 제발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가 가진 그 애조어린 비가의 절창이라면 다 괜찮다는 관용마저 생긴다. 그 정도로 <이민자들>의 그들의 삶은 공명한다. 


화자의 셋집 주인의 남편 헨리 쎌윈 박사, 초등학교 은사 파울 베라이터, 어머니의 외삼촌 아델바르트 할아버지, 맨체스터의 화가 막스 페르버는 모두 어린 시절 전쟁으로 또는 어떤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삶을 꾸리게 된다. 그들은 그런대로 잘 견디지만 어떤 기본적인 비가의 주인공이 되는 데에서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거나 몰락한다. 한때는 눈부시게 빛나던 청년들은 환자를 치료하고 어린 제자들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게 섣부른 극복이나 인생의 결정적인 선회의 계기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몰락하는 자의 정서는 <이민자들>을 관류한다. 폭력과 부정 앞에서 짓이겨진 그들의 추억들은 그러나 반드시 화자에게 채집되어 생생하게 복원되어 미처 끝맺지 못한 평행우주 차원의 삶으로 다시 복기된다. 아름다운 시간들은 환등기를 켜고 다시 상영하는 기록필름처럼 읽는 자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는 제발트의 이야기는 <이민자들>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축약이다. "사그라진 불꽃처럼 희미한 빛들"을 더듬어 가다 보면 우리는 지금도 저마다의 삶을 이야기로서 쓰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이미 죽은 자들의 잊혀진 삶이 결국 우리가 기억함으로써 어떻게 되살아나는지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자아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는 한계를 이야기함으로써 지평을 확장한다. 제발트만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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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26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제발트의 소설들을 접하고
만난 사진들에 깜빡 속은 기억이 나네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아쉬운 그런
작가입니다.

blanca 2021-03-26 20:05   좋아요 1 | URL
아, 저 예전에 <아우스터리츠> 읽고 제발트는 내 과가 아니구나, 그랬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하고 있는데 왜 이리 좋은 거죠? 취향도 시간에 따라 변하는 건지, 아니면 이해도가 더 깊어진 건지...그런데 다 너무 진짜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소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어요.

scott 2021-03-27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제발트 최고작은 이민자들과 토성의 고리!
라고 감히 ㅎㅎ
추천 합니다.

blanca 2021-03-27 17:41   좋아요 1 | URL
흑, <토성의 고리>가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현기증~> 이건 좀 별론가요? 읽어볼까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