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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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스트레스가 많거나 우울한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십오 년 동안이나 종이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한 서사의 진폭을 보이지 않더라도 잔잔한 감동의 여운이 길다. 언뜻 단조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는 작가 미우리 시온의 발견이 기대밖의 수확이다.


겐부쇼부 사전 편집부에서 퇴직을 앞둔 아라키는 새로운 사전을 만들려는 기획의 일환으로 영업부에서 엉뚱하고 외골수인 마지메를 스카우트해 오면서 '대도해 사전'을 출항시킨다. <대도해>는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배를 엮다>는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언뜻 허술하고 요령부득으로 보이던 마지메는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우직하게 <대도해>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며 사전 편집자로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출판사 측면에서도 크게 명성이나 이윤을 안겨다 줄 것 같지 않은 일에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실용과 실리에만 집착하는 지금의 세태와 대비되어 오히려 더 형형하게 빛난다. 소용이 닿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순간에 전념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바쁘게 달려가느라 끝내 놓치고 마는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멈추어 고민해 볼 시간을 준다. 작가 미우라 시온의 문장은 정갈하고 쉽고 느린 듯하면서도 특유의 속도감을 잃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삶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래서 어느덧 십오 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대도해>가 완성되었을 때 수많은 문장들이 엮어낸 그들의 노정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말의 배는 아쉽게도 죽음 앞에서 사전의 완성을 끝내 보지는 못했지만 죽음 직전까지 사전의 완성을 향해 자신의 여생을 바쳤던 고문 마쓰모토 선생의 영정 앞에 가 닿았다. 그 항해는 비록 종이 사전의 죽음을 품고 있는 것일지라도 언어의 기본, 그 핵을 향해 가닿으려는 장인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사유하는 한 그 말의 정의를 채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아진 이들의 열정과 정성은 깊은 화인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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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2-1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러고 보니 영화 제가 언급한 영화 <행복한 사전>의 원작인가 보네요.
이책 보긴했는데 원작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영화 혹시 안 보셨으면 함 보세요. 영화 되게 볼만해요.^^

blanca 2020-02-17 10:54   좋아요 1 | URL
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영화 보려다가 말았는데... 원작이라는 강한 심증이^^ 네, 꼭 찾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