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루마니아의 한 소년이 러시아 수용소에 끌려가 오 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향하는 이 이야기를 읽었다. 유대인의 포로 수용소 이야기가 아닌, 온 가족이 야밤에 나치군에게 끌려가는 이야기가 아닌, 루마니아의 독일어를 쓰는 가정에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두고 소년 홀로 끌려가 그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죽거나 다치거나 절망하거나 때로 해방되는 그 쉬운 결말 대신 귀향해서도 가족의 따뜻한 환대가 아닌 왠지 모르는 서먹함, 부적응을 여생 동안 걸머지고 다녀야 하는 소년의 마음을 택한 것은 기민한 핍진성이다.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그곳에서의 시간이라면 치를 떠는 증언들을 충분히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돌아오고 나서의 삶에 주목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초점이 거기로 옮겨가는 순간 이야기의 절실함에서 얻는 주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까, 포로 수용수에서 돌아온 많은 이들이 이후의 삶에 대하여 떠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해방 이후의 그 자유가 주었을 당혹감 대신 살아남은 자의 그 처절한 사투와 의지에 주목한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그러한 기대 의식을 배반한다. 아주 다른 이야기다. 색다르고 아름답고 처절하고 반역적인 이야기다. 이야기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삶의 속살에 가닿는 그 직접성은 직접적 체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고백 같았다. 


소년은 현재에도 있고 육십 년 이후에도 있다. 회고의 시점과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무의미한 반복적인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어 같은  단어들로 자신의 체험을 철저하게 재구조화하는 소년의 현재는 끊임없이 중첩된다. 그 정도로 수용소에서의 기아는 끈질겼음을 짐작케 한다. 소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아 상태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다.


삽질을 하며 나는 다시 정신을 추슬렀고,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중노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돌아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말을 부정했다. 그래요, 할머니, 하지만 그거 아세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p.81

그가 수용소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은 사물과 형상을 찾는다. 기아는 '배고픈 천사'가 된다. 그것은 실질적인 대상이다. 여러 장에 걸쳐 여러 에피소드에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 느끼는 그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배고픔에 대한 감정은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고픈 천사'는 수용소에서의 소년의 머리까지 기어오르고 소년이 하는 도적질, 존엄성의 포기, 타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 등 모든 행동과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정서이자 시발점이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하는 것일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

-p.265


수용소 이후의 삶에서 소년이 그가 집을 떠나 없는 동안 마치 그를 대체하듯 동생을 낳아버린 가족에 대하여 느끼는 서운함과 거리는 심지어 소년이 수용소에서의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의 박탈, 곤궁, 단순 노동에 대한 이끌림으로까지 나아간다. 러시아인이 아니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며 포로들을 괴롭혔던 수용소 지도부원 투어 프리쿨리치는 소년의 삶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말이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속성을 규정한다. 삶에 대한 무게의 중심추가 된다. 이 아이러니는 소년이 돌아오고 나서도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만큼은 해방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p.307

억압자는 피억압자의 그 억압적 체험이 삶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질 수 없음을 폭력적으로 암시한다. "나 거기 있었다"가 보물이 되는 순간 그의 삶은 평생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없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실제 소년 레오의 모델이자 목소리가 있었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함께 쓰자는 약속을 못 지키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헤르타 뮐러는 그와 함께 한 약속을 홀로 지킨다. 그가 얘기했던 '실존의 절대영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그래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마력을 가진다. 그녀의 어휘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이고 중의적이다. 오스카의 '숨그네'가 그녀를 통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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