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 오랜만에 미세먼지도 없고 완연한 봄이다. 사계절이 있는 것에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봄은 다른 공기 좋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나라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흥이 있는 것 같다. 더 농밀하고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뭉클함이 있다. 집 앞의 아련한 흔적 같은 산수유를 볼 때마다 뭐라 말로 하기 힘든 감동을 느낀다. 힘든 일을 겪던 와중에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갔던 기억. 난만한 꽃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나는 계속 걷다 울다 했다. 너무 젊었고 그 만큼 미숙했으니 울 일도 많았다. 다시 보는 산수유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산수유가 영원할 수 없고 그 산수유를 보는 나도 여기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문득 아득해져버린다. 내 손을 잡고 잘 걸어와주는 아이도 이제 곧 혼자 성큼성큼 걸어갈 거라 생각하면 또 그 미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한없이 아쉬워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모든 게 영원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철없음이 또 그리워지기도 하고. 꽃나무 한 그루가 온갖 단상을 길어 올린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바라보는 생이 찬란하다. 하루하루, 그 평범한 일상의 빛나는 찰나들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철학자 김진영의 그것만큼 생생하게 와닿았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그 어떤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존경스럽다. 생과 존재에 대한 예우를 이처럼 자신의 마지막으로 체현한 사람이 또 있을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프루스트도 이제는 과거의 텍스트가 아니라 저자의
사그라드는 생에 직접 와닿아 형형히 되살아난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문장들이 생에 돌연 날아와 꽂히면 삶 그 자체가 된다. 언어는 숨을 쉰다. 읽고 쓰는 일이 존재의 마지막까지 본분이자 남겨진 자들에 대한 배려와 책무가 되는 과정이 한없이 숙연해지게 만든다. 그가 인용한 차라투스트라의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는 문장은 저자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의 마지막 문장이 왠지 위로가 된다. 그가 남긴 책은 남겨진 자들의 애도 일기가 되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숙제처럼 남기는 대신 스스로가 미리 매듭지어 남겨 두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지만 도처에 사랑이 넘쳐 흘러 따뜻하다. 절망을 얘기하는 대신, 우리가 여기 지금에서 소비하는 일상들의 비의를 부각시켜 사는 일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산수유를 보는 일. 이렇게 서서 산수유를 볼 수 있는 지금은 영원하지 않아 눈물겹도록 찬란하다. 그것을 잊지 않기를 저자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