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미국인 모델이 우연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원폭 투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방송에서 듣게 됐다.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자신들의 억울한 입장을 토로했다. 죄없는 민간인들의 피해에 가슴 아파했고 미국인 진행자도 그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워 했다.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갔고 나 역시 전쟁의 가장 증오스러운 면이 그 전쟁에 동조한 적 없는 죄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서 2차 세계대전에 있어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책임은 통째로 빠져 있었다. 일본 또한 죄없는 수많은 여자, 남자, 아이들의 학살의 책임의 당사자가 아니었는가. 그 책임의 통감도 제대로 된 배상도 반 세기가 훌쩍 지난 현재에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전혀 개인적 유감이 없는데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논박할 처지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대단한 애국자여서거나 역사에 정통해서가 아니라 이제 남은 자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 중 일부만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그 빠진 나머지가 가지는 그 처절한 무게와 진실의 핵을 묻어버릴 경우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로 역사가 변질될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웠다.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힘없는자들은 남은 자들의 입과 펜 끝에서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테우리'라는 이국적인 말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제주도의 주특별자치도에서 목축(牧畜)이나 목축에 종사하는 이들을 관장하는 신. 제주도 에서는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 곧 목동(牧童)이나 목자(牧者)"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현기영의 '마지막 테우리'는 일흔여덟의 이 마지막 테우리 노인의 차마 말하여질 수 없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올가미 속에 개인의 삶이 포박당해 어쩔 수 없었던 개인의 그 무참하게 짓밟힌 자유 의지에 관한 회한이기도 하다. 현기영의 절창은 노인의 눈을 통해 역사와 무관하게 형형하게 빛나는 자연을 묘사함으로써 그 자연이 품어 온 수많은 범인들의 짓밟힌 삶을 더 한없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복원한다. 


한철이 끝나버린 목장은 바야흐로 초겨울 특유의 눈부신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스러져가는 생명이 마지막으로 발산하는 아름다움. 눈부신 금빛의 들판과 오름들, 서리 깔린 듯 하얀 억새꽃 무리들, 구름이 그림자를 던지며 지나갈 때마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밝았다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제주 4.3 사건 또한 역사 속에 음각되어 있던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이 비교적 최근들어서야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요구와 맞물려 드러나고 있다. 현기영은 실제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 마을의 몰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개인들의 아픈 상처를 형상화하고 있다. 너무 참혹해서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그 죄없는 죽음들은 반문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반문된들 도저히 얻을 답이 없으니 그 질문은 다시 허공의 메아리로 눈물과 만난다.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오빠, 형, 동생들의 요구는 죄없는 가족들의 몰살로 돌아왔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맞아야 하는지를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절경의 섬 안에는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었다. 제대로 말하여지지도 딱지가 앉지도 못한 상처에서는 아직도 진물이 흐르고 있다. 작가는 고향의 아픈 역사를 우직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말하기 시작하여진 것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적으로 동요했다. 하지만 제대로 적절하게 나의 마음과 입장을 설명한 언어를 찾지 못하는 당황스러움도 그 감정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나의 언어로 다시 재정립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논박하려면 나의 바깥을 흐르는 역사적 사실들을 내 안으로 먼저 끌고 들어와야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개인은 역사 바깥에서 별개의 개인적 삶을 꾸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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