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이패드를 할 때 "책 좀 읽어."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라니, 이건 영 아니다, 싶기도 하다. 독서를 강요할 수 있을까? 자꾸 나의 어릴 때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 때에 지금과 같은 스마트 기기에 대한 접근성이 있었다 해도 내가 과연 책을 읽었을까?, 자문하면 자신이 없다. 아이가 듣는 가요가 벌써 시끄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내가 육학년 때 신해철의' 재즈까페'를 들으면 시끄럽다고 불평하던 엄마를 보며 왜 그럴까? 이 좋은 노래가 시끄럽다니, 했던 모습과 겹친다. 결국 나도 이렇게 꼰대가 되어 가는 걸까?

솔직히 이 책의 제목이 솔깃하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톨스토이까지 공부와 연결시켜야 하는 세태라니. 하지만 우리 아이도 톨스토이가 너무 자주 회자되어 도리어 접근성이 떨어진 작가인 만큼 진가를 마음으로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톨스토이는 지루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아니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쓴 다소 교조적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고 쉬운 우화 형식의 이야기도 많다. 어렸을 때 접한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주인공들 이름이 죄다 '이반'이라 러시아의 철수 정도의 이름인 줄 알았던 기억이 난다. 아이는 제목을 접하고 좀 두려워하는 눈치였지만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 할아버지에 대한 입문을 했다.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다고 계속해서 반복중이다.
"엄마,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 내용은 대체 뭐야?"
"그건 음, 그건 말이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대체 결혼 생활 밖에서 사랑을 나눈 안나의 삶에 대해 어떻게 이 어린이 앞에서 설명해야 하나 난감해졌다. 나는 결국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게 참, 결혼을 했는데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래서... 그게 주는 아닌데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데 진짜 감동이야."
아이는 어리둥절한 모습.
"나도 읽어보고 싶은데..."
최악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설명 아니었나 싶다. 아니, 나는 지금도 나를 살 떨리게 했던 <안나 카레니나>가 왜 감동이었냐고 묻는 사람 앞에서 제대로 설명해 낼 재주가 없다. 내가 받은 감동과 톨스토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듣는 자가 원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또 엇갈린다. 요새에 들어서야 언어의 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그 수많은 진짜들에 숨이 차다.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과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답답하다. 그냥 느끼고 원하는데 그걸 언어로 담으려면 벅차다. 몇 마디로 진짜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얼크러진 헛소리가 자꾸 나온다. 그러면서 더 멀어지고 더 헤매는 듯한 혼란에 때로 자괴감이 든다.
아이가 언젠가 <안나 카레니나>를 제대로 읽고 그 벅찬 감동을 내가 하지 못했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해 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담아내어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를 아직도 찾지 못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건지도 확신이 안 선다. 나날이 더 배우고 더 잘 하고 싶은데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그게 아니라 퇴락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정말 선뜩하다. 무한한 길이 뻗어 있고 공부 할 수 있는 여지와 영역이 펼쳐져 있었던 시간들이 아득하다. 그게 착시였을 지라도 그러한 착각이 허용되던 그 시간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한번 지나오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