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갇히다 (이동호)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빗소리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 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 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딸기엄마 2005-07-21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좋으니 비가 왔음 좋겠어요. 여긴 지금 너무 더워요~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데 저희 집 실내온도가 30도가 넘는답니다~ㅠㅠ(좋은 시에 생뚱 댓글...)

검둥개 2005-07-21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님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마음. 선풍기에서도 나오는 것도 뜨건 바람일 때 정말 절망이죠. 저는 찬 물 샤워를 많이 하는데 그래서 여름에 재채기를 한다니까요 ^^
 

검은 구두 한 켤레 (신현림)


당신은 무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의 존재를 희망의 포로라 말하겠다
일과 사랑을 찾아다니는 구두였다고

구두 속에서 발은 여름 해같이 불타오른다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는 사건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외출은 번번이 새끼 밥을 안고 오는 일로 끝나거나
길어놓은 바닷물을 엎지르는 헛수고
불안은 구두를 자꾸 절벽으로 몰아갔다

사소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발의 진통, 발의 발작, 발의 광기
날로 거칠어지는 내 발은 뒤틀린 기형이고
구두는 까맣게 타버린 빵임을 깨달았다

나는 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고 한낱 낙서일 뿐
그러나 모두 슬픔이 없는 상실에 이르길 원하면서
죽은 풀조차 손에 뿌리뻗어 자라길 얼마나 소원했던가

발은 수술대 위에 놓여 있다 뒤틀린 뼈는 버려지고
 추억의 불가사리처럼 피로감처럼
내 발에 다시 악착같이 달라붙은 구두
지상을 떠날 때 해를 향해 날아갈 구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내 희망 한 켤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따뜻한 편지 (김광렬)


응달진 양지에 앉아 눈썹이 새하얘지도록 편지를 쓴다

사는 일이 너무나 아득해서 그대를 잊었노라고

구르는 낙엽에 새긴다

그대도 편지 받고 나처럼 오래오래 잊어도 섭섭지 않으리라

먼 훗날 기억나 나처럼 햇살 넘실대는 풀잎에 기대어

평생 잊지 못할 긴 편지 써주면

내 저 세상 간 뒤일지라도

앞발뒷발 다투며 그대에게 가 따뜻한 응달이 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진명)


비가 걸어온다
몇십 시간이고 걸어온다
걸음 크지 않고 빠르지 않다
그렇게 오래 걸으니
걸음 클 수도 빠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끌리고 쳐지는 커텐의
무거운 냄새를 피우는 건 아니다
눅눅한 냄새도 이미 없다
걸어, 걸어,
멍텅하게 그냥
끊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어, 걸어서
입이 바싹 말라서
그토록 걸어와서
쓰러지자 쓰러지자는 것일까
피곤, 피곤한 온몸을 텅,
무한 진공 속에 떨어뜨리고 말자는 것일까
피가 아래로 다 쏟아져내려
새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이 괴기스런
비, 비가 걸어온다
비틀거리는 것도 잊어먹은
멍텅한 시간이 끊이지 않고 걸어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하는 손 (최승자)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마다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Rodin-  Hands (photo by Carola Clift. 19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