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구두 한 켤레 (신현림)


당신은 무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의 존재를 희망의 포로라 말하겠다
일과 사랑을 찾아다니는 구두였다고

구두 속에서 발은 여름 해같이 불타오른다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는 사건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외출은 번번이 새끼 밥을 안고 오는 일로 끝나거나
길어놓은 바닷물을 엎지르는 헛수고
불안은 구두를 자꾸 절벽으로 몰아갔다

사소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발의 진통, 발의 발작, 발의 광기
날로 거칠어지는 내 발은 뒤틀린 기형이고
구두는 까맣게 타버린 빵임을 깨달았다

나는 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고 한낱 낙서일 뿐
그러나 모두 슬픔이 없는 상실에 이르길 원하면서
죽은 풀조차 손에 뿌리뻗어 자라길 얼마나 소원했던가

발은 수술대 위에 놓여 있다 뒤틀린 뼈는 버려지고
 추억의 불가사리처럼 피로감처럼
내 발에 다시 악착같이 달라붙은 구두
지상을 떠날 때 해를 향해 날아갈 구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내 희망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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