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이진명)
비가 걸어온다
몇십 시간이고 걸어온다
걸음 크지 않고 빠르지 않다
그렇게 오래 걸으니
걸음 클 수도 빠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끌리고 쳐지는 커텐의
무거운 냄새를 피우는 건 아니다
눅눅한 냄새도 이미 없다
걸어, 걸어,
멍텅하게 그냥
끊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어, 걸어서
입이 바싹 말라서
그토록 걸어와서
쓰러지자 쓰러지자는 것일까
피곤, 피곤한 온몸을 텅,
무한 진공 속에 떨어뜨리고 말자는 것일까
피가 아래로 다 쏟아져내려
새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이 괴기스런
비, 비가 걸어온다
비틀거리는 것도 잊어먹은
멍텅한 시간이 끊이지 않고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