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하나  (신동호)
 

  고맙다 세월이여
  가로수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귀가의 저녁에 너의 얼굴을 만나면
  배냇저고리, 색이 바랜 무명은 고통과 더불어 어머니의 장롱 어딘가에 묻혀있고
  장롱, 다섯번의 이사와 궁색한 가계를 지켜본 귀퉁이의 자개조각
  붙어 있는 그만큼 네가 고맙다
 
  스물이던 시절부터 가능하던 나의 아이여
  저물 무렵의 골목은 길어져가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 둘 스물하나 스물둘 세월마다 켜켜이 쌓인 그리운 이여,
  노을이 지면 그림자 사라지고 길은 짧아질까 그럴수록 천천히 걸어볼 일이었을까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준 나날이여
 
  한때나마 원망도 있었다
  서른의 구비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로 취급되었으므로
  가정과 안정을 추구하는 청춘의 꾀죄죄함이여
  생각해보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이미 나올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결과, 결과 또한 필연으로 가는 우연이 된다면
  세월아 또다시 집 밖으로 열린 세월아
  서른하나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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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03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보면서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를 떠올렸어요. 노래 올리고 싶은데..
이상하게 지금 저만 알라딘에서 html이 안되네요. ㅠ.ㅠ 내일 올릴께요!!

비로그인 2005-10-03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석 - 서른즈음에 [Live]

 어때요? 분위기 비슷하지 않아요? ^-^


검둥개 2005-10-03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엉엉엉엉엉. 이러면 안 돼. 진짜로 술 마시러 나갈지 몰라~~ ㅠ_ㅠ;;
 

모항으로 가는 길 (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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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히나 2005-10-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진주 2005-10-0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냐.........쩝..

검둥개 2005-10-0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요 저두요 .... ^ .^
 

성탄절 가까운 (신경림)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나보다
  가슴과 등과 팔에 새겨진
  이 현란한 무늬들이 제법 휘황한 걸 보니
  하지만 나는 답답해온다 이내
  몸에 걸친 화려한 옷과 갑진 장신구들이 무거워지면서
 
  마룻장 밑에 감추어 놓았던
  갖가지 색깔의 사금파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무딘 주머니칼로 새겨놓은 내 이름은 남아 있을까
  성탄절 가까운
  교회에서 들리는 풍금소리가
  노을에 감기는 저녁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버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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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5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오직 젊음의 펜대로만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에 마시는 마가리타 한 잔 같다고 하면, 이 눈부신 짧은 소설에 대한 적절한 찬사가 될까?

처녀작으로 18세에 일약 프랑스 문단의 총아가 된 사강은 술과 도박, 마약과 레이싱으로 위태로운 삶을 살았으며, 처녀작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지 못한 불운한 작가이기도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주인공은 17세의 소녀 세실. 보드란 찰흙처럼 타인의 영향에 민감하고, 오렌지의 강렬한 향이든거나, 커피의 뜨거운 쓴 맛,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입맞춤의 황홀함 같은, 감각이 제공하는 삶의 단순한 쾌락에 눈뜨기 시작한 계집아이이다.

이 매력적인 세실의 성격이 이 소설이 지닌 흡인력의 팔 할을 설명한다. 냉소적이고 사악할 정도로 계산적이지만 동시에 여리고 감성적이며 유유부단하고 (젊은 탓에 딱 그만큼) 무지한 여자애. 삶이 낯설고, 지루함과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주로서 외에는 인생을 달리 이해하지 못하는 이 아이가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 <슬픔이여 안녕>은 바로 그 실수에 대한 이야기이며, 순진하고 교묘한 젊음 속에 내재한 악마성에 대한 애틋한 송가(送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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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9-2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강렬하고 흡인력있는 리뷰라고 생각함!^^
(그런데 마가리타, 이름은 들어봤는데 뭐래유?)

검둥개 2005-09-2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이 짧지만 촌철살인의 코멘트!  사실은 짧은 데에 다 사연이 있어요. 십오년만에 다시 읽고 감동을 받아 (난 아직 젊은게야! +.+)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그게 안 써지는 거에요. 그래서 상품 사진을 박은 걸 그냥 지웠는데 그게 잘못해서 뻬빠로 저장이 되었더랍니다. 그걸 모르고 자고 나서 서재에 들어와보니까 거기에 댓글이 둘이나 달린 거에요. 윽. 댓글이 달렸으니 뻬빠를 지울 수도 없고. ㅠ_ㅠ 그래서 결국 안 써지는 리뷰를 울며 겨자먹기로 ^ . ^

  마가리타는요, 요렇게 생긴 잔에 나오는 술. 소금이 주변에 박혀 있어요. 예전에 선배가 사 줘서 한 잔 먹었더랍니다. (공짜라면 하여간 양잿물도 먹어요.)  ^^;;;  음, 한 번 더 마셔보고 싶네요.


로드무비 2005-09-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아하니 색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소금이 박혀 있다니,
한번 마셔보고 싶군요.^^

검둥개 2005-09-2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색깔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파란색으로 만들 수 있다고 들은 거 같아요. 아니 내가 먹은 게 파란색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

blowup 2005-09-2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가리타.. 이상하게 확~ 취하는 음료(?)죠. 마가리타 마시고 맛이 갔던 기억이 있어요. 속이 울렁울렁거려요. 흔히 소금을 손등에 묻혀 멋지게 입술로 훑죠. 작업용 술 같기도 해요.

blowup 2005-09-2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굵은 오버 스티치 같은 리뷰. 무슨 말일까요? ㅋㅋ

검둥개 2005-09-2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ㅋㅋ 작업용 술이요. 표현이 재밌습니다. :)
근데, 굵은 오버 스티치 같은 리뷰는 무슨 말이래요? @.@

blowup 2005-09-2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뜻이에요. 오버 스티치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멀리서도 눈에 확 띄어요.^^

검둥개 2005-09-2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런 뜻이근요. ㅎㅎ 저도 그 표현을 나중에 써먹어봐야겠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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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9-2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독일, 터키, 브라질....
-죄송합니다-

검둥개 2005-09-2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흐,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쓴다고 하다가 못 썼는데 사진만 그냥 저장이 되어버렸네요. 근데 여기다 댓글 다시면 어떡해요 마태님? ^^;;; 실수였는데. 윽.

검둥개 2005-09-2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참, 새벽별님까지. ㅠ_ㅠ;;;
결국 도둑이 제 발 저려 리뷰를 쓰고 말았습니다. 쓰기 정말 힘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