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조금만 쉽게 말씀해주심 안 될까요?
가끔은 손을 번쩍 들고 시인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시압!


野菜史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고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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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1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미의 시는 쉽고 생동감 넘치죠. 언제나. 라디오 작가이기도 했다는데... 지금도일까요?
(이렇게 쓰고 났는데, 검둥개 님의 코멘트가 보이네요. 이제사. 음. 김경미의 시는 감각적으로 잘 읽히는 편인데.. 아닌가--;;)

검둥개 2005-11-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는 알쏭달쏭했어요. ^^;;; 제가 원래 대충 읽는 주의라서요... ㅎㅎㅎ

2005-11-18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1-1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모르는디요. 쿠궁... ^^;;;; 가사 겁나게 좋아요. 점심시간에 꼭 찾아볼께요. 감사. *^^*
 

 무우에 바람 들었다고 하던가, 그런 말이 생각나게 하는 시다.

  

 마음의 정거장 (김명인)

 

  집들도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
  때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켠에 널 세워 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처마밑까지는 따라들지 않아
  바람에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 듯
  잎잎이 놓아 버려 텅 비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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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집, 제재소, 이발소 유리창 밖......늦가을의 서정이 물씬합니다.^^

검둥개 2005-11-1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재소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더라구요. ^^;;; 로드무비님 맘에 드신다니 기쁘옵니다. 사실 제가 찾구 있던 말은 주조장이었는데요,,, ㅎㅎ 혹시 주조장 나오는 시 아시나요? *^____^*

플레져 2005-11-1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조장... 나오는 드라마는 알아요. 전원일기라고...쿨럭 ;;;
십일월의 스산함을 글로 표현하는게 만만치 않아요.
시인, 역시 시인입니다.

검둥개 2005-11-1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숨어서 무슨 작업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가 했더니,
유머감각을 갈구 닦구 계셨군요. 쿄쿄쿄 *^^*

로드무비 2005-11-1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조장 나오는 만화는 알아요.
<명가의 술>이라고...쿨럭=3
그런 시 보면 알려드릴게요.^^

검둥개 2005-11-1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가의 술>이요. 제목 죽이는데요.
*^______^*
 

VOGUE야 (김수영)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도 아냐 羨望조차도
아냐---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羨望도 아냐

마룻바닥에 깐 비니루 장판에 구공탄을 떨어뜨려
탄 자국, 내 구두에 묻은 흙, 변두리의 진흙,
그런 가슴의 죽음의 표식만을 지켜온,
밑바닥만을 보아온, 빈곤에 마비된 눈에
하늘을 가리켜주는 잡지
VOGUE야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 위에 또하나

넓은 자리가 있었던 것을 자식한테
가르쳐주지 않은 죄---그 죄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몰랐다
VOGUE야 너의 세계에 스크린을 친 죄,
아이들의 눈을 막은 죄---그 죄의 앙갚음
VOGUE야

그리고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할 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안한다
안하기로 했다 안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에게도 엄마에게도 모든
아버지보다 돈많은 사람들에게도
아버지 자신에게도

<196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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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5-11-1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 요즘. 바쁘신가봐요? ^-^;

검둥개 2005-11-1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게으른 거죠. 앗 들켰다. ^ .^;;;

가시장미 2005-11-1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히! 언니의 글을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검둥개 2005-11-1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간신히 하나 뻬빠 썼으요. ^^;;; 아부엔 또 이렇게 약한 모습 =3=3=3
 
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년 시절을 회상하면 반드시 잊혀지지 않는 상호라든가 친숙한 과자 이름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대여섯살이던 내가 럭키 치약을 사러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던 "근대화 근 연쇄점" 같은. 지금 돌이켜보면 70-80년대 한국이 아니었다면 세상 어느 나라에서 동네 구석구석마다 들어앉은 구멍가게 이름으로 "근대화"가 쓰였을까 싶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정말 슬프게도, 이 구멍가게 이름만큼 19세기 말 이래 굴곡 많았던 한반도의 역사를 잘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굴곡 많았던 우리나라의 근대화, "굴곡 많은 역사"라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반도의 역사에 붙여지는 이 문구에는 그 진부함을 압도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 봉건왕조의 몰락이 식민지로의 전락으로 이어지고, 독립의 뒤를  따른 것이 내전과 그 결과로 두 조각으로 쩍 갈라져버린 한 민족 두 나라라면, "굴곡 많은"이 아니라 "기구한"이 쓰인다고 해도 부족한 수사가 아닐까. 거기다가 자유권이나 평등권 같은 건 고사하고 생명권조차도 간신히 바들바들 부여잡고 살아야 했던 폭압적 군부독재 이삼십년을 셈해 넣으면 그 역사는 차라리 "한스럽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동경에서 유학를 했고 거제도에서 포로살이를 했으며 기자를 그만 두고 닭을 키우며 시인과 번역가 노릇을 했던 시인 김수영은 란닝구 자락을 걸치고 이렇게 읊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시, "거대한 뿌리" 중에서)  

알아야 사랑도 할 수 있구나, 라고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낀" 깃발이었다는 것, 육이오는 자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쌍방의 민간인 거의 백만을 학살한 내전이었다는 것, 박정희는 선생 노릇을 하다, 일본육사를 나와 황군장교가 되었다가, 광복군이었다가, 남로당 군사부의 일원이었고, 그리고 그 남로당의 당원 명단을 다 부는 대가로 살아남아 이후 군사쿠테타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걸 만들어낸 독재자라는 것, 그리고 그 박통이라는 자의 자원 덕분에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도 기피한 베트남 민간인 토벌 작전에 희생되었다는 것. 

이런 우울하고 썩어빠진, 반동에 다시 반동으로 얼룩진 역사를, 그걸 다 알고도, 아니 다 알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하는 것, 그런 역사라도 있어서 내가 뿌리 내릴 땅이 있다고 황송해하는 것, 그것은 더럽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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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1-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이라는 시인의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근대화든 현대화든 징글징글하고 눈물겹기도 하고...그래요.
옛 연쇄점 이름으로 리뷰 제목을 삼으시다니 검둥개님의 발랄함이란!!^^

하루(春) 2005-11-11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게 어느 동네에나 다 있던 건가요? 저희 동네에도 있었어요. 집을 나와 골목을 빠져나오고, 찻길을 무단횡단 해서 20여미터 걸어가면 있던 가게 이름... 제목 참 튀네요. ^^

blowup 2005-11-1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3권밖에 안 읽었어요. 다 읽고나면 리뷰를 쓸 수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도발적이고 기죽지 않는 리뷰라니. 흥. 속상하잖아요. 나는.

2005-11-11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1-1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어머 저 발랄했어요? ^ .^ ㅋㅋㅋ 고맙습니다.

하루님 그쵸? 저두 오랫동안 그건 저희 동네에만 특이한 이름인 줄 알았었답니다. 그러나, ㅎㅎㅎ 아니었지요. ;)

나무님의 멋진 리뷰가 나오고 난 후라면 어찌 제가 부끄러워 리뷰를 올릴 수 있었겠어요? ^____^ 나무님의 리뷰 기다리구 있을께요.
 
 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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