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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ㅣ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평점 :
유년 시절을 회상하면 반드시 잊혀지지 않는 상호라든가 친숙한 과자 이름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대여섯살이던 내가 럭키 치약을 사러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던 "근대화 근 연쇄점" 같은. 지금 돌이켜보면 70-80년대 한국이 아니었다면 세상 어느 나라에서 동네 구석구석마다 들어앉은 구멍가게 이름으로 "근대화"가 쓰였을까 싶어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정말 슬프게도, 이 구멍가게 이름만큼 19세기 말 이래 굴곡 많았던 한반도의 역사를 잘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굴곡 많았던 우리나라의 근대화, "굴곡 많은 역사"라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반도의 역사에 붙여지는 이 문구에는 그 진부함을 압도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 봉건왕조의 몰락이 식민지로의 전락으로 이어지고, 독립의 뒤를 따른 것이 내전과 그 결과로 두 조각으로 쩍 갈라져버린 한 민족 두 나라라면, "굴곡 많은"이 아니라 "기구한"이 쓰인다고 해도 부족한 수사가 아닐까. 거기다가 자유권이나 평등권 같은 건 고사하고 생명권조차도 간신히 바들바들 부여잡고 살아야 했던 폭압적 군부독재 이삼십년을 셈해 넣으면 그 역사는 차라리 "한스럽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동경에서 유학를 했고 거제도에서 포로살이를 했으며 기자를 그만 두고 닭을 키우며 시인과 번역가 노릇을 했던 시인 김수영은 란닝구 자락을 걸치고 이렇게 읊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시, "거대한 뿌리" 중에서)
알아야 사랑도 할 수 있구나, 라고 이 책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낀" 깃발이었다는 것, 육이오는 자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쌍방의 민간인 거의 백만을 학살한 내전이었다는 것, 박정희는 선생 노릇을 하다, 일본육사를 나와 황군장교가 되었다가, 광복군이었다가, 남로당 군사부의 일원이었고, 그리고 그 남로당의 당원 명단을 다 부는 대가로 살아남아 이후 군사쿠테타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걸 만들어낸 독재자라는 것, 그리고 그 박통이라는 자의 자원 덕분에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도 기피한 베트남 민간인 토벌 작전에 희생되었다는 것.
이런 우울하고 썩어빠진, 반동에 다시 반동으로 얼룩진 역사를, 그걸 다 알고도, 아니 다 알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하는 것, 그런 역사라도 있어서 내가 뿌리 내릴 땅이 있다고 황송해하는 것, 그것은 더럽게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