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이겼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다. 이 소식으로 미국이 들썩들썩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의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의 티비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다소 당혹스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아무래도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오바마를 유권자들이 당신,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좋아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요지의 질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했는지?
이 질문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첫 대답은 그런 말을 들으니 속이 쓰리다(I am hurt.)는 것이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경륜을 강조하는 힐러리 클린턴의 대꾸 직후 오바마는 이렇게 코멘트했다. “당신도 호감을 사기엔 충분해요.(You are likable enough.)”
호감을 살만 하다는 이 likable이라는 말. 나는 왠지 코가 깨지는 기분이었다. 이 코멘트를 날릴 때만큼은 오바마도 전혀 likable해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한 사람을 호감이 가게 만들거나 정이 떨어지게 하는 것일까?
흔히들 사람과의 관계는 첫인상이 그 구십퍼센트를 좌우한다고 한다. 하지만 첫인상이 상대의 인격을 정확하게 반영할 가능성이 구십퍼센트이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대선 후보를 호감이 가느냐 안 가느냐의 문제로 재단하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학창시절의 반장선거를 뒤돌아보라. 항상 똘똘하지만 정이 안가는 아이보다는 호감이 가거나 뭔가 멋져 보이는 친구에게 투표하지 않았던가? 후보는 정책을 보고 찍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 이론이고, 실제로는 정책을 일일이 비교할 시간도 없거니와 과연 그 정책이 어느 정도 유세용인지 실제로 추진이 될만한 가능성이 있는지 도대체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렇다보니 점심먹을 시간도 빠듯한 현대의 유권자들은 이런 식으로 후보를 선택한다. 저 후보가 내 맘에 드는가 안 드는가? 보다 객관적으로 묻자면, 저 후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가, 아닌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후보가 내가 따를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는 언뜻 보기에 비합리적이어도 사실상 꽤 경제적인 결정방식이다. 선택 기준을 단순화함으로써 선택과정을 신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힐러리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에 보인 한 방울의 눈물은 전략적으로 꽤 성공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뉴욕타임즈의 시니컬한 칼럼니스트 모린 도드는 이미 오늘자 신문에 힐러리 클린턴은 남성에 기대어 (뉴욕주 상원의원이자 민주당 대선 후보 지원자라는) 현재의 성공에 이르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자 정치가들 못지않은 남성성을 증명하려고 분투하면서도 (이라크 문제에 관련해서), 결정적으로 패배가 예고되는 순간에는 여성성을 이용해 (유권자와 이야기하면서 티비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 승리를 얻어냈다고 주장하는 칼럼을 실었다.
실제로 각종 티비 토론과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종종 정치적 야심에 사로잡힌 계산주의자의 모습을 강하게 보여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티비에서 보인 눈물마저 미리 수백번 연습한 결과라고 공박하는 것은 어쩐지 사리에 맞는 일인 것 같지 않다. 상대가 계산주의자라는 전제를 미리 깔아야만 상대의 눈물을 연습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 중 그녀에 대한 안티세력이 너무 커서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 후보로 결격이라는 주장도 역시 비논리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남들이야 뭐라건 혹은 남들 말에 혹해서 힐러리 클린턴을 미워하기로 오래 전에 결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로써 말하자면 오바마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어짜피 내겐 선거권이 없는 데다가 어쨌거나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 중의 하나를 뽑아야 하는 선택이라면 최근의 한국 대선에서의 선택처럼 착잡한 심정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정치인을 고르는 일이 호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아마추어들의 직업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래서야 원 아마추어가 정치판에 나온다고 불만을 터트릴 수도 없지 않나.
정치 프로들보다 더한 아마추어들이 세상에 또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