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번 가을 학기에 야간수업으로 자바를 들었다. 원래 작은 가전기구에 장착되는 컴퓨터 칩을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자바는 어렸을 때 들어 이름이 친숙한 코볼이라든가 파스칼과는 달리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하는 컴퓨터 언어다. 엉뚱하게 전산학과 수업을 들을 생각을 한 것은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해택 때문이었다. 내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직원들에게 학교 야간수업을 저렴한 가격에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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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생으로 들으려 했지만 연습이 필요한 지식은 사실 듣기만 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학점 따는 다른 학생들 하듯이 하기로 했다.  워낙 기초적인 내용이라 머리가 아프지는 않으나 역시 잘 프로그램을 짜려면 필요한 훈련과 연습을 비껴갈 도리가 없었다.  하다보니 재미도 나서 더 중요한 학위과정 과목은 되려 대충대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겨울 휴강 기간에 숙제가 잔뜩 주어졌는데 연말이 이런 사정 저런 사정으로 바쁜 데다가 서울까지 다녀오다 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돌아와서 밀린 숙제며 기말 프로젝트를 보고 있으니 텅 빈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 뿐.

어제는 퇴근하고 와서 드디어 마지막 숙제를 풀기 시작했다. 원래 프로그래밍이 대개 그렇듯, 이렇게 하면 될 거라는 막연한 아이디어와 막상 그 아이디어를 실제로 오류 없이 작동하게 만드는 작업 사이에는 예상 외로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단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 루프를 이렇게 고치면 될 것 같은데, 저 변수를 이리로 옮기면 될 것 같은데, 도대체 줄마다 점검을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오류를 끙끙대며 잡아 내고 컴파일링 과정에서의 한심스런 오타를 고치는 사이에 주변의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조금만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뭉기적거리는 동안 어느새 창 밖은 훤하게 밝아오는 중이었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제트랙 증상에 더해 밤을 새었으니 속이 쓰리고 몸이 쑤셔서 도저히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직장에 오늘 병가 낸다는 좀 생뚱스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갔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뭣 때문에 십 년 전 대학을 졸업한 내가 엉뚱스레 먹고 사는 데 별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닌 자바 연습문제 따위를 풀겠다고 밤을 새웠을꼬.

뭔가 할 일이 딱히 있느냐 없느냐와 무관하게 밤이 깊어지고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하면 속이 상하다 못해 화가 나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다. 예전엔 밤엔 많은 일을 했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남들이 다 자는 야밤에 엉뚱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쓰는 시각도 왠지 야밤이어야 할 것 같고 인생에 대한 큰 계획을 세우는 시간도 왠지 깊은 밤이어야 할 것만 같다.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일도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도 자정이 넘은 조용하고 깊은 시각이 아니면 왠지 적합하지 않을 것만 같다.

한 밤에만 누릴 수 있는 이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이제 일주일에 여섯번 꼬박꼬박, 자정도 되기 전에  잠자리로 기어들어간다. 다음 날 일하려면 일정 시간 자야만 하고 일어나기 전에 일정 시간 잘 수 있으려면 자정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가족도 이웃도 다 잠든 한밤중 최면에 걸린 듯 자바 연습문제 따위를 혼자 풀면서 그토록 뿌듯해했던 것은 그런 연유였다. 야밤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한밤에 깨어 있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고 싶었다. 금쪽같은 병가를 낭비하는 걸로 씁쓸하게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친구들 나이 드는 모습을 대하고 하나둘 병을 얻어 시름시름하는 늙은 부모와 친지들을 보며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살고 가는 것은 아무리 길다고 해도 결국 아주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는.
어떤 조미료를 풀어야 밍밍한 국 같은 이 삶의 맛이 확 살아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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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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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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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13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조미료를 풀어야 밍밍한 국 같은 이 삶의 맛이 확 살아날까? 라는 검둥개님 말씀에..

오늘 누군가가 하는 말이 사명과 열정이 있어야 인생이 사는 맛이 난다던데
사명.. 은 좀 거창한 듯 싶고 뚜렷한 목표는 좋긴 하겠습니다만.
미친듯한 사랑..은 하자니 힘겹기만 하고
누군가는 춤을 배우는게 우울을 쫓는 (살도 빼는) 특효약이라고 자꾸 유혹을 하지만
올해는 톨스토이, 푸루스트, 앙드레 지드 등의 그 옛날 읽은 책들을 다시 읽고
주황색 접는 자전거를 사고
클라리넷이나 사진을 배울까.. 합니다.
워낙 성격이 그래서인지 남하고 같이 하는건 하나도 없구만요 흠흠..
그나마 밖에나가 자전거라도 타겠다는 생각이 발전이라고나 할까.
아참, 한국서 운전 좀 잘해보게 담주부터 연수도 받을거랍니다.

검둥개 2008-01-14 04:09   좋아요 0 | URL
저도 운전 연수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시간이 안 나네요.
장농 면허 칠년이라. ^^

자전거도 탄 지 오래되었는데 Manci님 말씀을 들으니 맘이 동하는군요.
주황색 접는 자전거라 동네에서 타도 폼이 날 듯!

저도 옛날 읽은 책들을 조만간 다시 읽을 계획입니다.
집에서 사십킬로 싸가지고 왔거든요.

2008-01-14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ky 2008-01-1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40킬로의 책! 많이 행복하시겠어요. ^^
한국여행도 좋으셨을 것 같구요.(저도 이번 2월에 한국 갑니다. 시동생 결혼식이 있어서요.) 오랫만에 검둥개님 글 보니까 반가워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검둥개 2008-01-14 12:07   좋아요 0 | URL
이고 지고 오느라고 죽을 뻔 했어요.
엄마가 다 버린다고 위협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덕분에 새 책을 많이 못 사와 아쉽다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한국 여행도 잘 하시구요.
맛난 음식도 많이 먹구 오세요.
전 얼마 있지 못해서 먹는 데 한계를 느꼈지 뭡니까. :-)

로드무비 2008-01-1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엄선하느라 무지 힘드셨겠어요.
행복하기도 하고.^^

검둥개 2008-01-14 13:54   좋아요 0 | URL
책 싸고 무게 재느라고 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하마터면 비행기 놓칠 뻔 했어요.
제한용량까지 꽉꽉 채워서 짐을 싸들고 오니까
그래도 왠지 비싼 비행기값을 뽑은 듯 뿌듯하긴 했답니다.
언제나 이 본전정신 ^^;;

달팽이처럼 자기가 읽은 책들은 결국 자신이 싸서 짊어지고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과거에 읽은 책들과 떨어져 사는 건 뭔가 영혼의 일부를 잃은 채로 사는 것 같다고 :-)

비로그인 2008-01-1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다시와서)
아, 검둥개님. 바로 위 댓글 마지막 두줄이 너무 멋집니다.

검둥개 2008-01-20 02:10   좋아요 0 | URL
앗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