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를 불러주세요

출처 : 마음에 드는 학교(그런데 거기서도 퍼왔다고 되어 있네요. 원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겠어요 ㅠ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전화를 놓은 집이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 벽에 붙어 있던, 반질반질하게 닦은 참나무 전화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수화기가 그 통 옆에 걸려 있었다. 전화 번호까지 생각나는데, 우리집은 109번이었다.

나는 워낙 꼬마라서 전화기에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거기 대고 말을 할 때면 홀린 듯이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한 번은 어머니가 나를 들어 올려 지방에 출장중인 아버지와 통화하도록 해준 적도 있었다. 이거 참, 요술 같은 일이 아닌가!

이윽고 나는 이 멋진 기계 속 어딘가에 놀라운 인물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람은
여자였는데, 이름은 '안내를 부탁합니다'였다. 그 사람은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 누구네 전화 번호라도 어머니가 묻기만 하면 척척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어쩌다 밥을 안 줘 우리집 시계가 멎기라도 하면, '안내를 부탁합니다'는 즉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곤 했다.

내가 이 전화기 속의 요정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어느 날 어머니가 이웃집을
방문하러 갔을 때였다. 지하실에 꾸며놓은 작업대 앞에서 놀다가, 나는 그만 망치로 손가락을 때렸던 것이다. 너무나도 아팠지만 집 안에는 나를 달래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울어봤자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쿡쿡 쑤시는 손가락을 입으로 빨면서 집 안을 헤매다가 어느덧 층계 옆에 이르렀다.
전화기다. 나는 얼른 응접실로 달려가 발 받침 의자를 끌어왔다. 그 위에 올라서서 수화기를 들고는 귀에 갖다 댔다. 그리고 전화통에 붙은 송화기에 대고 말했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한두 번 짤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 귀에 들려왔다.

"안내입니다."
"손가락을 다쳤어, 잉…."

나는 전화기에 대고 울부짖었다. 이제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생기자,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펑펑 쏟아졌다.

"엄마가 안 계시나요?"
"나밖에 아무도 없는 걸, 잉…."
"피가 나요?"
"아냐, 망치로 때렸는데 막 아파요."
"냉장고를 열 수 있어요?"

나는 열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얼음을 조금 꺼내서 손가락에 대고 있어요. 금방 아픔이 가실 거예요. 얼음을 꺼낼 때 조심해야 해요."

이렇게 가르쳐준 뒤, 그 사람은 상냥하게 덧붙였다.

"자, 이제 그만 울어요. 금방 나을 테니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게 있으면 '안내를 부탁합니다'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지리 공부를 하다가 전화를 걸면, 그녀는 필라델피아가 어디 있으며 오리노코 강은 또 어디로 흐르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설명만 들어도 멋있어서, 나는 이담에 커서는 꼭 이 강에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였다.

그녀는 또 내 산수 숙제를 도와주었고, 내가 공원에서 잡은 다람쥐에게 과일이나 땅콩을 먹이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우리들이 애지중지하던 카나리아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즉시 '안내를 부탁합니다' 를 불러 이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 뒤 어른들이 흔히 어린애들을 달랠 때 하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하며 온 가족에게 기쁨을 선사하던 새가 어떻게 한낱 깃털 뭉치로 변해 새장 바닥에 숨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했다.

"폴, 죽어서도 노래부를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웬지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또 전화기에 매달렸다.

"안내입니다."

이제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FIX(수리하다)'라는 말을 어떻게 쓰죠?"
"무언가를 고친다는 뜻 말이죠? 에프 아이 엑스(fix)예요."

바로 그때, 언제나 나를 골려 주기 좋아하던 누나가 층계에서 나를 향해 뛰어내리며, '왁'
하고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수화기를 쥔 채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 바람에 수화기는 뿌리채 전화통에서 뽑히고 말았다.
우리는 둘 다 겁에 질렸다. '안내를 부탁합니다'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수화기 코드를 뽑아내어 혹시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나 걱정되었다.

얼마 후 한 남자가 현관에 나타났다.

"난, 전화 수리공이야, 저 아래서 일하고 있는데, 교환수가 부르더니 이 집 전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가보라고 하더라. 무슨 일이 있었니?"

나는 그에게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아, 뭐 그런 건 잠깐이면 고칠 수 있어."

그는 내게서 수화기를 받아들고는 전화통을 열었다. 얽히고 설킨 전선과 코일이 드러났다.
그는 끊어진 전화 코드를 잡고 조그만 드라이버로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이윽고 수화기를 한두 번 두드린 뒤 전화에 대고 말했다.

"여어, 나 피터야. 109번 전화는 이제 괜찮아. 누나가 겁주는 바람에 애가 놀라서 수화기 코드를 뽑았더군."

그는 수화기를 걸고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 모든 일들은 북서 지방 태평양 연안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내가 아홉 살이 되자, 우리는 대륙을 가로질러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그때 나는 수화기 속의 내 가정 교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물론 새로 이사온 집에도 전화기는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부탁합니다.'는 어디까지나 두고 온 고향의 낡은 나무 상자 속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응접실의 작은 테이블에 놓인 번쩍번쩍 빛나는 새 전화기에는 웬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0대로 접어들면서도, 어린 시절 그 사람과 나눈 대화의 추억은 결코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간혹 어려운 문제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그 옛날 '안내를 부탁합니다.'에 물어 올바른 해답을 얻었을 때의 안도감이 생각나 나는 그녀와 헤어졌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제는 나도 알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꼬마 소년에게 자기의 귀중한 시간을 내어준 그녀는 얼마나 참을성 있고 친절하며 이해심 깊은 사람이었던가!
몇 년 뒤, 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서부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공중 전화로 누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나는 이제 결혼하여 그곳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무얼 하는지도 분명히 모르면서 어느덧 나는 고향 마을의 전화국을 불러 말하고 있었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흡사 기적과도 같이, 너무도 귀에 익은 저 가깝고도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내입니다."

애당초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지껄이고 있었다.

"저, '휙스'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주시겠어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은..."

'안내를 부탁합니다'는 말했다.

"....손가락은 다 나았겠지요?"
"정말 아직도 계시는군요. 하지만 아마 모르실 걸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이 제게 얼마나 귀중한 분이었는지...."
"당신이야말로." 그녀는 대답했다.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평생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곤 했답니다. 우습죠? 이런 얘기?"

결코 우습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내가 그 동안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를 말하고, 1학기가 끝나 다시 누나를 만나러 올 때 전화해도 좋으냐고 물었다.

"부디 그렇게 해줘요. 그냥 샐리를 찾으면 돼요."
"안녕히 계세요. 샐리."

'안내를 부탁합니다'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니 기분이 웬지 묘했다.

"혹시 다람쥐를 만나게 되면, 과일과 땅콩을 먹으라고 말해주겠어요."
"그렇게 해요."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오리노코 강에 가봐야겠지요? 그럼, 잘 가요."

석 달 뒤, 나는 다시 시애틀 공항에 내려 전화를 걸었다.

"안내입니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샐리를 바꿔 달라고 했다.

"친구분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러시다면 유감이지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샐리 씨는 병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잠깐씩만 일하셨습니다. 그 분은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내가 전화를 끊으려 하자 그녀는 물었다.

"잠깐, 혹시 폴 빌라드 씨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시다면 샐리 씨가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편지지에 적어놓으셨지요."
"무슨 말씀인데요?"

나는 물었지만 이미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있군요. 읽어드리겠습니다. - 그에게 말해줘요. 죽어서도 노래부를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는 내 말 뜻을 이해할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샐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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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9-09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학년 남자아이 하나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왜 제 얼굴이 거울에는 보이는데 유리에는 안 보여요?
왜 불을 켜면 잘 보여요? 저건 뭘로 만들어요?
빛이 굴절된다는 게 뭐에요?
...
처음에는 잘 받아주고 함께 책도 찾아보고 했는데, 요즘 좀 바빠진 데다 결정적으로 책도 다 싸버렸으니 이젠 무식이 탄로나서... 스스로 좀 귀찮게(때로는 두렵게) 느꼈던 참이었습니다.
결국 지금은 책이 없다는 핑계로 과학조교선생님께 보내버렸죠...ㅠㅠ 나중에 도서실 다시 오픈하면 오라고 했는데, 올지 안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글을 읽었습니다.
무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水巖 2004-09-0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신데 아침부터 이렇게 슬픈 이야기 들려주시나요?
호랑녀님이군요.

호랑녀 2004-09-09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수암님... 부지런하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일찍 나오시는군요 ^^
영광이옵니다.

반딧불,, 2004-09-09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아니면,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아니면..
여하튼 그 종류의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랍니다.

딱 꼬집어서는 생각이 안나는데..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도 이 글 읽으면서 이런 어른이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요.
아니..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준다는 것은요.

진/우맘 2004-09-0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아침부터....분노에 이어 눈물을....
(참, 분노는 제 서재에서 일어났던 일이어요. 공들여 쓴 글을 날려먹었거든요.-.-)

마태우스 2004-09-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읽었었는데, 다시 봐도 겁나게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호랑녀 2004-09-09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새벽별님...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제 아이들, 가족의 얘기를 들어주기도 참 어렵네요. 많이 들으라고 귀는 두 개고, 조금만 말하라고 입은 하나라는데, 가만 보면 제 입은 아이들에게 잔소리하느라, 남편에게 바가지긁느라, 또 변명하느라, 다른 사람 씹느라 ㅠㅠ... 입이 너무 바빠서 귀가 들을 틈이 없네요... 아... 반성반성...
진우맘님... 분노할 일이 자꾸 생기는군요. 학교컴이 더 그런가요? 저보다 빈도가 훨씬 잦은 듯합니다. 게다가 복사도 하기 전에... 날아갔다구요...
마태우스님... 고맙습니다. 전에 읽은 걸 다시 감동해주셨군요 ^^
그런데 이상하다... 다들 슬프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냥 아름답다고만 느꼈어요. 제 감정 전선에 이상이 생겼나봐요...ㅠㅠ

mira95 2004-09-0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기란 너무 어려운 일 같아요.. 귀찮아서 또는 답을 몰라서 무시해버렸던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네요...

starrysky 2004-09-0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들, 어머니들은 왠지 반성하는 분위기시로군요. ^^
전 그냥 키보드 위에 눈물 떨구며 읽었어요.. 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 너무 좋아해요.. 전에 친구랑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런 책 읽으면서 막 우니까 친구가 챙피하다고 딴 자리로 가버렸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