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는 계약사서(나의 공식명칭이다. 일용직 사서에서 계약사서로 바뀌었다.)들의 직무연수가 있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정식 연수를 받는 건 처음이라, 그리고 평소 거의 무시당하고 있던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일이라 기쁜 마음에 이틀 동안 열심히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으로 그렇게 오래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강의를 듣고, 다른 계약사서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 도서실에서 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메모했다.

1. 독서주간 행사

 - 일주일쯤 독서주간으로 선포하고, 독서퀴즈대회, 도서바자회, 동화구연대회, 작가와의 대화, 사이버 독서토론대회, 도서전... 등등을 한꺼번에 한다.

 - 가을에 운동회와 겹치면 반별로 책주인공 가장행렬을 한다. (예를 들어 한 반이 해리포터로 정했으면 해리포터의 각 등장인물로 변장해서 입장한다.)

 - 하기만 한다면 내 손이 부르트더라도 전교생에게 책갈피를 만들어 선물하겠다!

2. 도서실 소식지 발행

3. 아침방송에서 좋은 책 소개

 - 도서반원 혹은 사서교사, 담당교사가 방송에 나가 도서실에 있는 책 중 한두 권을 소개하는 코너를 운영한다.

4. 방학중 독서프로그램 운영

 - 일주일쯤, 혹은 방학 내내 프로그램을 짜서 독서교실을 운영한다. 독후활동을 재미있고 빠방하게 시켜서 방학숙제를 해결해준다.

마술강좌를 하려면 주변 중고등학교의 마술동아리를 활용해서, 와서 아이들 가르쳐주면 봉사점수를 주는 방법으로...(착취일까?) 해결한다.

종이접기를 한다면, 그림책 중 동물원 책을 읽어주고, 그 다음에 색종이로 동물들을 접은 다음 전지에 동물원을 꾸며서 붙이게 한다. 완성되면 반드시! 벽에 게시한다.

5. 도서반 운영

 - 아침에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을 위해 매일 아침 8시쯤 도서실 문을 연다. (대출반납은 사서교사가 출근하는 8시 30분 이후부터 가능) 담당서가를 하나씩 정해주고 그 서가의 정리를 맡기며, 사진을 붙여 두어서 자긍심을 높여준다.

6. 수업시간에 도서실 활용

 - 예를 들어 물에 사는 생물에 관해 배울 때, 도서실에 와서 모둠별로 한 모둠은 인터넷 검색하고, 또 한 모둠은 백과사전을 찾고, 또 어떤 모둠은 도감, 단행본 등을 찾아서 미리 준비한 활동지를 작성하고 발표한다.

뭐 이런 것들은 내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A4 용지 두 장에 간단하게 정리한 후, 교장선생님께 연수보고도 드릴 겸 들어가 드리고 나왔다.

교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후의 생각

1. 그래. 내가 참 교장실에 들어가기 싫어했던 이유가 있었지. 또 깜빡 잊었었군.

2.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듣는 교육을 참 잘 시켜야겠다.

3. 나는... 도서실의 붙박이장일까?

그래서... 어제 퇴근 후 집에서 내내 슬펐다.

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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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언니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교장얼굴에 오선지를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

숨은아이 2004-07-0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교육을 잘 시켜야겠다." 심지어 교장선생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니 정말 서글프네요. 사회생활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말을 우선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무조건 남의 말을 꺾으려 드는 사람을 만나곤 하죠. 대화를 의사소통이 아니라 말싸움 내지는 말로 하는 경쟁으로 생각하나 봐요.

숨은아이 2004-07-0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주인공 가장행렬은 정말 좋은 생각 같은데... 코스튬 플레이를 만화만 가지고 하란 법 있나요? 할 수 있으면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진/우맘 2004-07-0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다음 페이지는 내가 그려드리지요!
왜 그러실까? 교장샘들은 보통 학교 행사 많아지는 걸 좋아하시는데.(자신은 일 안 하고 목에 힘 줄 수 있으니까.)
호랑녀님을 울 학교로 스카웃 해 오고 싶어요.TT
(울 학교는 독서 중심 학교라서, 독서 담당 선생님이 사서 아르바이트생 데리고 고군분투 하고 있거든요. 어디는 일이 넘치고, 어디는 한데도 안 준다....참, 내.)
힘 내세요. 화이팅!

가을산 2004-07-0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럴때는 각개격파를 하면 어떨까요?
호랑녀님 생각에 동의하는 선생님들을 먼저 꼬셔서 선생님 재량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끔...
어차피 관심 없는 선생님들은 학교차원에서 해도 시늉에 불과할거구요...

호랑녀 2004-07-0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교장샘... 일하기 참 좋아하시는 분이거든요? 특히 남의 눈에 띄는 사업... 정말 좋아하세요. 작년까지는 대충 했던 가을운동회도 엄청 크게 한대요. 벌써 준비에 들어갔죠.
그런데 왜 제가 하는 일은 싫어하실까, 이유가 뭘까...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인간관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ㅠㅠ (제가 학부모인 것이 혹시 부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려고 해요.
도서실 게시판에 혼자 도서실 소식지 만들어 붙여놓고,
활동지 쌓아두었다가 원하는 애들 하라고 주고,
선생님들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교과과정별로 참고도서 목록 뽑아드리고,
가끔 도서실 게시판에 퀴즈 내서 이벤트하고...
도서반도 내 맘대로 그냥 뽑아서 운영하고...
흑흑...

sooninara 2004-07-0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화이팅!!! 힘내세요..

반딧불,, 2004-07-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그저 묵묵하게 제 자리 지키는 것이 어쩌면...
조금의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합니다.
태산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란 말을 요며칠 전에 들었답니다.
무엇이든 차근차근하라구요.

starrysky 2004-07-0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장선생님 정말정말 나빠욧!!! 호랑녀님께서 만드신 프로그램 읽으면서 제 마음이 다 두근두근했는데, 눈은 어따 두고 귀는 뭐에 쓰시는 거예욧!!! 엉엉!
진/우맘님 학교에서 호랑녀님을 빨리 스카웃해서(고액연봉으로다가) 하시고 싶은 모든 독서 프로그램 다 하실 수 있었음 좋겠어요. 저 하나하나가 다 아이들한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칠 텐데..

로렌초의시종 2004-07-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화려하고 그지 없이 맘에 드는 프로그램들을 보고 실제로 하시는 건지 알고 축하를 드리려 했는데, 끝에 있는 말씀을 보고, 새삼 저는 우리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절감했습니다. 호랑녀님 힘내세요. 어쨌든지간에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요......

호랑녀 2004-07-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늘 아침... 악몽을 꾸다 일어났는데요,
꿈 속에서 교장선생님이 갑자기 호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도서실 리모델링을 하지 않겠다고, 그 돈으로 다른 걸 하시겠다고 하는데 하겠다고 하시는 게 ... 학교 야광조명이었습니다. ㅠㅠ
개꿈이죠?

로렌초의시종 2004-07-1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죠~~!!!

호랑녀 2004-07-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렌초시종님... 언제 다녀가셨어요?
저는 지금부터 열심히 일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