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틈히 읽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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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 이오덕학교 http://club.cyworld.nate.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0424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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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관심이 고착화되고, 연구를 위한 자금 역시 산업과 기업의 목적과 결합되며, 표준과 선택의 환경에서 사적영역의 힘이 증가되는 현 대학의 상황은 프레네 교육학의 협력, 평등, 그리고 비판적 사고의 성격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곧, 경쟁, 사적소유권, 표준화, 중앙정부의 요구에 더욱 부합하는 책무성, 기업 서비스, 기업의 복제판, 전문가의 권위 등을 강조하는 이러한 비호의적인 대학의 환경에서, 프레네 교육학의 적합성 여부이다. 주로 초중등 교육에 폭넓게 참고 되는 그의 교육론이 대학에서 어떤 모습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를 David Clanfield의 글을 토대로 대략 정리해 둔다. 경우에 따라, 그리 새로울만한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1. 협력 학습: 교실 안팍으로 소집단을 형성하고, 공유된 학점을 부여하며, 평가에 학습자를 포함시킨다. 학생간 편집과 초고의 교환, 전체 학급구성원과 공유할 수 있는 협력적(공동) 글쓰기를 해본다.
2.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 의해 행해지고 공유되는 유용한 작업: 학습자들이 직접 자료를 만들고, 학급 프리젠테이션을 시행하며, 학생들이 관심을 둘만하거나 그들에게 유용한 자료를 창조하도록 격려한다. 이를 위해 유용한 학습 도구를 마련하고, 도서관에서 이용 가능한 자원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3. 차별화된 학습: 요구분석과 관심사항 조사, 그리고 맞춤식 연구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차별화된 학습이 가능하도록 한다.
4. 자연스러운 학습: 동기부여는 합리적으로 프로그램된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자 자신의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웹사이트를 개발하거나 수업의 결과물을 모아 출판하는 것 등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5. 학습과 (공적인)지원: 학습은 교실을 넘어서 사회의 변화를 (공적으로)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관련된 활동가들을 수업에 정기적으로 초대하고, 공동체와 접촉하도록 하는 일은 사회적 참여(social activism)에 대한 신뢰를 제공할 것이다.
6. 제도화된 지식과 비판: 학문분과 사이의 경계를 깨뜨리거나, 경쟁의 윤리에 대한 제도적인 강조에 도전한다.

이상 프레네의 원리들과 기법들은 새로운 세대들이 현상태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된다. 곧, 분석적 사고, 협력적 행위, 실험하기의 방법, 정보공학 모두는 강력한 도구들이다. 교사들이 이러한 원리들과 기법들의 밑바탕을 이루는 평등과 사회정의에 헌신하며, 더욱 폭넓은 공적인 관심에 복무하도록 하는 확실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여전히 대학은 삶의 길을 보여주는 통로이자, 모두를 위해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드는 가운데, 참된 사회적 진보의 씨앗을 배양한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출처: Clanfield, David. "Using Freinet Pedagogy in a University: Challenges, Frustrations and Happy Outcomes". http://ecolesdifferentes.free.fr/CLANDFIEL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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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반을 꼬박 책한권과 보냈다. 우선, 책 마지막 한 구절을 옮겨적는다.

"삶을 통한, 삶을 위한, 작업(travail)을 통한 학교"

 새로운 교육의 "큰집"을 짓기위한 토대는 모든 인간 활동의 근거이자 본질인 "작업"이어야 하며, 아이들은 배우고, (정신, 지식따위를)풍부히하고, 스스로를 완성하고, 자라고 성장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교는 이러한 작업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그것을 위한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이는 "들판에서의 작업"과 "동물기르기", "대장일과 목공", "실잣기와 바느질, 요리하기, 집안일", "건물짓기, 기계다루기, 거래하기", "탐구, 문헌조사, 지식쌓기", "실험(관찰하고, 해보고, 검증하는 등의)", "예술적 창조와 표현, 그리고 의사소통"등이 가능한 작업장(교실)들로 학교구조를 재편하는 것이다. 결국, 작업이라는 토대를 통해서만,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교육의 완성, 곧 새로운 교육의 튼튼한 "큰집"을 지을 수 있다. 아울러, 아이들이 종사하는 이러한 작업은 놀이와 대립되는 것이 아닌 작업-놀이(travail-jeu)를 뜻한다. 일단 여기까지만. 200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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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교수가 신문칼럼도 쓰나보네요. "인간자본(Humancapital)"이니, "인간자원(Humanresource)"니 하는 단어들은 제게도 "최악의 단어"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대학 4년을 겉돌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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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인간자본과 인재(人材)

1991년부터 해마다 독일언어 전문가들의 모임인 ‘언어비판적 행동’은 ‘단어 아닌 단어’를 선정하는데,2004년의 최악의 단어로서 ‘인간자본’(Humancapital)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원래 기업경영에서 직원의 지식, 경험 그리고 능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자본’은 고객과 조직관리를 근간으로 하는 ‘구조적 자본’과 함께 기업의 ‘지적 자본’을 구성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어 이 단어가 최악의 단어로 선정되었는가.

▲ 송두율 교수

인간을 자본증식을 위한 재료나 소재(素材)로서 바라보는 발상은 ‘인간자본’이 물론 처음은 아니다. 산업자본주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의 19세기 중엽의 노동자의 생활참상을 런던에서 한때 기자로 일하면서 목격한 독일의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도 ‘인간소재’(Menschenmaterial)라는 단어를 이미 사용했다.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그의 동시대인 칼 마르크스도 역시 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 단어를 구사했다.

이 ‘인간소재’라는 단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인재’(人材)가 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등치(等値)시킬 수 없는 어떤 의미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인재등용’이니 ‘인재양성’처럼 ‘인재’는 다분히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데 대하여 ‘인간자본’이나 이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인간소재’는 주로 경제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지구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강조되고 있는 ‘인재’의 경제적 의의는 한국사회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에서 ‘인재’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기업들도 이제는 ‘인재’의 국적조차도 문제삼지 않고 ‘인재사냥’(war for talents)에 나서고 있다.

막스 베버는 동양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을 발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요인중의 하나를 동양사회의 인문적인 ‘문화인’에서 찾은 적이 있다.‘선비’가 아마도 이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양의 기능적인 ‘전문인’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인재’의 이념형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이러한 ‘인재’는 대학사회에서조차 발붙일 틈이 없는 것 같다. 교육은 경제발전에 종속되어야 하고, 대학도 기업체처럼 운영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관철되고 있는 조건에서 위에 말한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인재’의 개념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인간자본’을 최악의 단어로 선정한 배경에는 분명히 사회전체를 곧 시장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 깔려있다. 이에 대해서 ‘인간자본’을 옹호하는 측은 자본과 인간을 결합시킨 이 새로운 개념이야말로 소재라는 물질적 개념에 의거해서 ‘인간착취’나 ‘인간소외’를 연상시켰던 과거의 ‘인간소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지식’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의 경제사회에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반박한다. 비물질적인 정보가 주도하는 탈현대적(postmodern)인 사회의 자본과 인간관계를 기존산업사회의 그것처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자본’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우리의 ‘인재’가 담고있는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재’는 단지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인재’(人才)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사람이라는 재목’을 키운다는 뜻의 ‘인재’(人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이 단순히 경제의 종속변수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꼬리를 물고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물론, 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준 엽기적인 사건들이 이러한 의미전화(轉化)의 당위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기사일자 : 200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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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 중에서 보석 같은 작품이 눈에 띌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진다. 그냥 좋은 점수를 주고 말 것인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똑같은 보석을 찾아낼 것인가. 불행히도 몇 개의 열쇳말 검색으로 그 탁월한 보고서의 바닥이 드러날 때가 적지 않다. 가끔은 두 학생이 우연히 똑같은 자료를 ‘참조’하여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두 개의 서평을 제출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심과 추궁 전문의 법조계를 떠나 대학으로 왔건만, 5년의 선생 노릇 끝에 ‘스승’보다는 ‘수사관’ 쪽에 가까워진 서글픈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공격적 ‘수사관’이 시험 답안지를 채점할 때면 감사에 대비하는 방어적 ‘회계사’로 변신하는 것도 재미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얼마나 학점에 민감한지 30대 이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성적이 공개되면 ‘객관적’으로 계량화된 근거 제시를 요구하는 편지로 교수의 전자우편함이 넘쳐난다. 이에 대비한 그럴듯한 채점 기준과 세분화된 점수표의 사전 준비는 교수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학생들의 인터넷 표절과 학점 과민증세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영어를 잘하고 좋은 학점을 얻어야 취직이 된다. 그런데 영어공부에 역량을 집중하자니, 교수가 추천하는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써 낼 시간이 없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이 인터넷 아니던가.

결국 독서 대신 인터넷 검색을 선택하면, 개인적 경험과 감동까지 담뿍 담긴 멋진 서평을 금방 완성할 수 있다. ‘수사관’에게 걸리는 불행한 사건만 터지지 않는다면, 영어와 학점을 동시에 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좀 과장하자면 이제 망국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어디 대학생들만 문제인가. 교수의 모든 업적을 점수로 환산하는 업적평가방식이 도입되면서 교수들은 점수를 채우기 위한 ‘계산기’로 변했다. 이공계통에나 통할 이런 평가방식을 인문사회를 비롯한 전 분야로 확대하는 데 기여한 ‘추진력 있는’ 총장들이 개각 때마다 장관 기용의 1순위로 꼽히는 걸 보면, 그런 방식이 ‘경쟁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인용도 높은 외국학술지 200점, 학술진흥재단(학진) 등재지 100점, 저서 150점, 번역 70점 따위로 수치화된 획일적 평가체계 속에서, 교수 자신의 오랜 사색을 담은 긴 호흡의 저술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학진 등재지를 만들기 위해 논문 탈락률을 조작하는 학계 일각의 관행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인 학술지일수록 조작은 더 쉽고, 그런 조작을 마친 학술지는 곧장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권력’으로 부상한다.

피 말리는 번역을 하느니, 외국 논문들을 적당히 조합한 내 이름의 논문 한 편을 쓰는 것이 점수 따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번역서도 나올 수 없다. 아무도 안 읽는 논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한편에서, 출판기획자들은 최소한의 글 솜씨를 갖춘 교수 필자를 찾기 어렵다고 한탄한다. 논문 실적을 발판삼아 ‘더 나은’ 대학으로 신분 이동을 꿈꾸는 일부 교수들이 자신과 ‘수준이 안 맞는’ 학생들의 지도를 포기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학점에 목맨 학생과 학진에 목숨 건 교수들이 서로를 방치하는 가운데, 대학과 인문학은 그렇게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대통령과 대학총장들이 난리를 치면 칠수록, 대학생들은 더욱 더 책을 읽지 않는다. 대통령과 총장들이 말하는 ‘경쟁력’ 속에 인문학적 교양이 포함되지 않음을 영악한 대학생들이 진작부터 알아차린 까닭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교육의 ‘산업적 측면’에 눈을 돌린 대통령은, ‘우리 경제계의 요구를 대학에 정확히 반영할’ 교육부총리를 찾고 있다. 그러나 누가 교육부총리가 되든지, 교양서 한 권 읽은 적 없는 대졸 ‘통역기계’들이 만들어갈 ‘선진조국’의 미래는 보나마나 뻔하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01057000/2005/01/0010570002005012518271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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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2-2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셜리스트 못지 않게 제너럴리스트도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한지를 모르겠어요

bildung 2005-03-01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댓글을 써야할지 저도 난감하네요. 예전에 친구랑 '넓게 파는 것'과 '깊게파는 것'에 관해 해답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그냥 생각날 따름이에요. 나나님을 비롯하여 가끔 들러주시며, 글남겨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낯을 좀 가리는 관계로 아직 활동반경을 넓히지 못하고 있어요. 참고로, 저도 가끔 친구랑 어찌하면 사서가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이야기하곤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