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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교에 가야 하나요? ㅣ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6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 지음, 강혜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하르트무트의 조카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학교엔 왜 가야 하는 거죠?”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학교에서 벗어난 사회deschooling에 대한 논의와 학교 밖 실험들이 부쩍 늘어난 요즈음에. 대뜸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가 지닌 온갖 문제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가 지닌 성격을 지적하며, 바보나 일개 소모품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학교엔 가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대답해줄까, 아니면, 그래도 학교엔 가야 사람도 되고, 무언가도 배우고, 대학도 가고, 어떤 사회적인 지위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해줄까. 또 어떤 대답들이 가능할까? 한 발 더 들어가, 이 책의 큰 제목들이기도 한 “왜 배워야 하죠?, 학교가 나쁠 수도 있나요?, 좋은 학교는 어떤 학교를 말하죠?, 학교는 정말 필요한가요?”라는 질문들에는 또 어떻게 대답할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는 이 책에도 언급된 바처럼, 가정형편에 상관없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아이들을 수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 길거리를 점령할 것이란 생각에서),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립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모르기에 이를 알고 있는 이(이를테면 어른들)들이 학교를 통해 이를 가르쳐주어야 하기 때문 등일 것이다.
하르트무트는 학교에 가면 나쁜 점들도 경험하고, 못하게 되는 것도 있고, 학교에서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뭘까? 다음의 몇 가지가 아마 그가 제시하는 해답일 것이다.
첫째, 사람들은 혼자 살아가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배워야만’한다. 한 예로, 먼 옛날 사람들에게는 몸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식량구하기, 집 마련과 음식보호, 질서유지를 위한 도구)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들(의사소통의 수단, 공동의 규칙(소유와 분배 따위의 공적인 차원의 규칙), 규칙준수를 위한 자세)로 묶이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들이 있었다. 학교는 바로 그러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정말 필요한 것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으면, 아직 모르는 것, 해보지 않은 것이며, 배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학교는 실제로 보고 만지면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학습 자료를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가 실생활 속에서 배울 수 없는 것, 자신의 부모나 마을 연장자들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과거의 삶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닌 오늘의 삶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학교에서 배운 것을 통틀어 “교양Bildung”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이를테면 다양한 능력과 보편적 지식(마법적 삶이나 미신적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3Rs, 컴퓨터, 외국어, 우화와 같은 이야기, 역사, 과학 따위의 능력과 지식)을 습득하고, 어떤 것이 선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게 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생활습관을 지닌 이와 사귀는 것(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칭찬하고, 잘못을 범했을 때 잘하게 도와주는 일 따위), 그리고 ‘진리’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철저히 검토하는 것과 관련된다. 헨티히는 “교양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하고는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한다.
셋째, 학교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뽑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일깨우는 교양과 민주주의(“국민이 왕이나 다른 지배자의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의 규칙을 정해나간다”는 뜻에서)를 배우는 곳이자, 훌륭한 시민이 되는 법을 배우는 축소된 정치의 장polis(도시이자 독립된 국가)이다. 따라서, 학교는 의무화되어야하고, 학교 졸업자에게 일종의 ‘시민권’(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면허증)을 주어야한다. “우리가 대표자를 잘못 선택했을 때 그건 바로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대한 관심은 어른이 되기 전부터 기르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런 차원에서 선거규칙이나 정치문제에 관심이 있어야) 즉, “학교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기 위한 곳”이다.
그리고, 학교는 바로 이상의 것들을 배우는데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존재하는 곳이다.
넷째, 학교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평화로움을 해치는 행위, 왕따나 희생양 만들기, 로봇처럼 아이를 대하는 교사, 점수를 매겨 서열화 하기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문제를 어떻게 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바른 생활태도와 이성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역시 더 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다음과 같은 원칙들에 바탕을 둔 학교의 역할을 충실히 이해하는 학교는 “아이들이 나중에 더 큰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미리 연습하고 익숙해질 수 있게 도와”준다. 곧, 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도록 노력한다, ② 우리는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 ③ 놀이를 할 때 물건의 위치를 바꾸면 놀이가 끝난 뒤 모두가 함께 물건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정리한다, ④ 우리는 다른 친구들이 정한 질서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우리의 규칙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⑤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그런 차이들을 인정한다..., ⑥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지시만 한다. 그 외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또 어떤 것을 의무적으로 해야 할 때도 그것을 이행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여섯째,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 중 선생님 없이 스스로 배울 수 있지만(체험한 것으로부터 스스로 깨우칠 수 있지만), 학교는 우리가 ‘바깥세상’에서 보고 체험한 것을 해석하고(실제 삶에서 경험한 것들을 설명해주고 범주화해 줌) 보충해주고(체험한 것들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나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나 믿었던 것 또는 미래에 생각해야 할 것 등과 연관지어 더 크게 생각하게 함) 일상에서 얻는 파편적인 경험들을 하나의 전체로 끼워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곧, 학교 역시 삶의 일부로, 우리가 파편적인 부분들만 보면서 사는 것 대신 전체를 이해하며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끝으로, 좋은 학교는 글쓴이의 말처럼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면 한다. 한국의 학교는 이 통로를 언제까지 불온시할 것인가?
“네가 다니는 학교가 좋은 학교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이미 좋은 학교라면 계속 앞으로도 그렇게 유지될 수 있도록 너도(네 부모님과 함께) 노력해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한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시도는 학교가 실수를 했을 때 못 본 척 눈감아 버리지 않는 거란다. 학교로부터 그저 ‘수업 받는 것’만 기대하는 학생들 즉 가르치고 묻고 평가해서 학기말 성적표를 주는 그런 학교만 기대하는 학생들은 오로지 그것밖에 얻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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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학교를 바라보는 이들에겐, 이 책의 논지가 순진한 것이고,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학교의 실체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겉꾸밈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듯싶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바대로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엔 우리의 학교가 너무나 멀리 가 있어 난감해하는 이들도 있을 듯싶다. 아니면, 상투적인 몇 마디를 빼면 도통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던 이들에겐 쉬운 말로 엮인 좋은 참고서를 하나 얻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읽고 판단하시길. <2007-4-5일 수정>
“학교에 가야만 하는 필요성을 깨닫는 것”은 학교에 다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헨티히는 말하는데, 이는 그이의 말대로 학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정말로 “배울”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필요성을 깨닫을만큼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는지, 배웠다면 무언인지, 아니라면 왜 그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