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학교에 가야 하나요?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6
하르트무트 폰 헨티히 지음, 강혜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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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무트의 조카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학교엔 왜 가야 하는 거죠?”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학교에서 벗어난 사회deschooling에 대한 논의와 학교 밖 실험들이 부쩍 늘어난 요즈음에. 대뜸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가 지닌 온갖 문제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가 지닌 성격을 지적하며, 바보나 일개 소모품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학교엔 가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대답해줄까, 아니면, 그래도 학교엔 가야 사람도 되고, 무언가도 배우고, 대학도 가고, 어떤 사회적인 지위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해줄까. 또 어떤 대답들이 가능할까? 한 발 더 들어가, 이 책의 큰 제목들이기도 한 “왜 배워야 하죠?, 학교가 나쁠 수도 있나요?, 좋은 학교는 어떤 학교를 말하죠?, 학교는 정말 필요한가요?”라는 질문들에는 또 어떻게 대답할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는 이 책에도 언급된 바처럼, 가정형편에 상관없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아이들을 수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면 길거리를 점령할 것이란 생각에서),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립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모르기에 이를 알고 있는 이(이를테면 어른들)들이 학교를 통해 이를 가르쳐주어야 하기 때문 등일 것이다.

하르트무트는 학교에 가면 나쁜 점들도 경험하고, 못하게 되는 것도 있고, 학교에서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뭘까? 다음의 몇 가지가 아마 그가 제시하는 해답일 것이다.



첫째, 사람들은 혼자 살아가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을 ‘배워야만’한다. 한 예로, 먼 옛날 사람들에게는 몸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식량구하기, 집 마련과 음식보호, 질서유지를 위한 도구)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것들(의사소통의 수단, 공동의 규칙(소유와 분배 따위의 공적인 차원의 규칙), 규칙준수를 위한 자세)로 묶이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들이 있었다. 학교는 바로 그러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정말 필요한 것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으면, 아직 모르는 것, 해보지 않은 것이며, 배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학교는 실제로 보고 만지면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학습 자료를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가 실생활 속에서 배울 수 없는 것, 자신의 부모나 마을 연장자들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과거의 삶에만 머물러있는 것이 아닌 오늘의 삶을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학교에서 배운 것을 통틀어 “교양Bildung”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이를테면 다양한 능력과 보편적 지식(마법적 삶이나 미신적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3Rs, 컴퓨터, 외국어, 우화와 같은 이야기, 역사, 과학 따위의 능력과 지식)을 습득하고, 어떤 것이 선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게 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생활습관을 지닌 이와 사귀는 것(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칭찬하고, 잘못을 범했을 때 잘하게 도와주는 일 따위), 그리고 ‘진리’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철저히 검토하는 것과 관련된다. 헨티히는 “교양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하고는 함께 살고 싶지 않다”고 까지 말한다.



셋째, 학교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뽑으면 안 되는 이유를 일깨우는 교양과 민주주의(“국민이 왕이나 다른 지배자의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의 규칙을 정해나간다”는 뜻에서)를 배우는 곳이자, 훌륭한 시민이 되는 법을 배우는 축소된 정치의 장polis(도시이자 독립된 국가)이다. 따라서, 학교는 의무화되어야하고, 학교 졸업자에게 일종의 ‘시민권’(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면허증)을 주어야한다. “우리가 대표자를 잘못 선택했을 때 그건 바로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대한 관심은 어른이 되기 전부터 기르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런 차원에서 선거규칙이나 정치문제에 관심이 있어야) 즉, “학교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기 위한 곳”이다.

그리고, 학교는 바로 이상의 것들을 배우는데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존재하는 곳이다.



넷째, 학교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평화로움을 해치는 행위, 왕따나 희생양 만들기, 로봇처럼 아이를 대하는 교사, 점수를 매겨 서열화 하기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문제를 어떻게 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바른 생활태도와 이성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역시 더 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다음과 같은 원칙들에 바탕을 둔 학교의 역할을 충실히 이해하는 학교는 “아이들이 나중에 더 큰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미리 연습하고 익숙해질 수 있게 도와”준다. 곧, 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도록 노력한다, ② 우리는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 ③ 놀이를 할 때 물건의 위치를 바꾸면 놀이가 끝난 뒤 모두가 함께 물건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고 정리한다, ④ 우리는 다른 친구들이 정한 질서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우리의 규칙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⑤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그런 차이들을 인정한다..., ⑥ 꼭 필요한 최소한의 지시만 한다. 그 외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또 어떤 것을 의무적으로 해야 할 때도 그것을 이행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여섯째,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 중 선생님 없이 스스로 배울 수 있지만(체험한 것으로부터 스스로 깨우칠 수 있지만), 학교는 우리가 ‘바깥세상’에서 보고 체험한 것을 해석하고(실제 삶에서 경험한 것들을 설명해주고 범주화해 줌) 보충해주고(체험한 것들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나 과거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나 믿었던 것 또는 미래에 생각해야 할 것 등과 연관지어 더 크게 생각하게 함) 일상에서 얻는 파편적인 경험들을 하나의 전체로 끼워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곧, 학교 역시 삶의 일부로, 우리가 파편적인 부분들만 보면서 사는 것 대신 전체를 이해하며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끝으로, 좋은 학교는 글쓴이의 말처럼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으면 한다. 한국의 학교는 이 통로를 언제까지 불온시할 것인가?

“네가 다니는 학교가 좋은 학교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이미 좋은 학교라면 계속 앞으로도 그렇게 유지될 수 있도록 너도(네 부모님과 함께) 노력해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한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시도는 학교가 실수를 했을 때 못 본 척 눈감아 버리지 않는 거란다. 학교로부터 그저 ‘수업 받는 것’만 기대하는 학생들 즉 가르치고 묻고 평가해서 학기말 성적표를 주는 그런 학교만 기대하는 학생들은 오로지 그것밖에 얻지 못해.”

__________

좀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학교를 바라보는 이들에겐, 이 책의 논지가 순진한 것이고,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학교의 실체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겉꾸밈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듯싶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바대로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엔 우리의 학교가 너무나 멀리 가 있어 난감해하는 이들도 있을 듯싶다. 아니면, 상투적인 몇 마디를 빼면 도통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던 이들에겐 쉬운 말로 엮인 좋은 참고서를 하나 얻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읽고 판단하시길. <2007-4-5일 수정>

 

 “학교에 가야만 하는 필요성을 깨닫는 것”은 학교에 다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헨티히는 말하는데, 이는 그이의 말대로 학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정말로 “배울”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필요성을 깨닫을만큼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는지, 배웠다면 무언인지, 아니라면 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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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보리 편집부 엮음 / 보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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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군에서 제대하고 얼마 뒤 갓 나온 이 책을 만나 행복해한 바 있다. 지금은 이 책에 소개된 글과 유사한 글들이 (상대적으로)제법 소개된 편이고, 그동안 접했던 것들이 있어 신선감이 덜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하다. 아울러, 여기에 실린 글들을 뽑아내고 묶어낸 편집자의 안목에 여전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최근 개인적인 이유에서, 당시의 흔적들을 지우개로 지우며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여러 편의 글들 중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제기하는 다음의 내용만을 간략히 소개해본다.

    교육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본 일이 있는가? 왜 우리는 학교에 가서 그 많은 과목들을 공부하고, 왜 시험을 보며 더 좋은 점수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가?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인가? 직업을 갖고 돈을 버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그것을 위해 우리가 교육을 받는가? 교육은 다음과 같이 삶을 이해하는 일이다.

    1. 교육은 삶의 모든 문제들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는 지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여기서 지성은 어떤 틀이나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아내는 능력을 뜻한다.
    2. 교육은 단순히 단편적 지식을 얻거나 사실들을 끌어 모아서 엮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전체로 깨닫게 하는 것, 곧 온전한 삶의 전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를 깨닫는 것, 곧 참된 뜻에서 교육은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존재 전체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4. 참된 교육은 개인이 온전하게 자라서 자유를 누리고, 사랑과 덕성이라는 위대한 꽃을 피우도록 북돋워 주는 일이다. 우리가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이같은 진정한 교육이지, 어린이를 어떤 이상의 틀에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다.

    아울러, 교사는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와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며, 참된 교사가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올바른 교육의 본질을 깨닫고,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천직이며 올바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올바른 교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교육인식은 사티쉬 쿠마르나 비노나 바베의 글에서도 유사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오덕선생님의 “일하기와 교육”이 담긴 [삶과 믿음의 교실], 윤구병선생님의 “아이들을 건강한 파괴자로 길러야 한다”라는 글이 담긴 [실험학교이야기]도 함께 읽어두면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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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쿠니 어린이 마을 세계의 대안학교 1
호리 신이치로 지음, 김은산 옮김 / 민들레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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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에 대한 글쓴이의 문제의식과 그것을 걷어내는 ‘새로운’ 실천의 모습을 확인하면, 이 ‘나무 나라’ 어린이 마을이 지향하는바가 무엇인지를 우선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1.
호리가 지적하는 현 학교의 문제는 첫째, 학교의 주인이 아이들이 아닌 교사라는 점, 둘째 그런 교사가 중심이 된 일제 수업에서 학생수가 많은 학급일 경우 아이들의 개성이나 개인차를 거의 무시한다는 점, 셋째, 학습 내용에서 체험이나 생활의 요소가 거의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는 간략히 1) 교사중심주의(관리주의), 2) 획일주의, 3) 교과서중심주의의 문제로 표현할 수 있다(175).

2-1.
이와 달리 호리가 원하고 새로이 실천하는 학교는 "교사의 관리 대신 아이의 자기결정이나 자유로운 선택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획일적인 학습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아이들 하나 하나의 개성을 존중하고, 지식전달보다 구체적인 생활이나 창조를 매개로 한 학습을 중요시하는" 곳이다(171). 곧, 새로운 학교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온다(176).

① 교사중심주의 → 자기결정의 중시(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한다.)
② 획일주의 → 개성 존중(한 사람 한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다양하게 학습한다.)
③ 교과서 중심주의 → 체험학습(행함으로써 배운다.)

세 번째 체험학습과 관련된 '프로젝트'는 이러한 변화를 조화롭게 살릴 수 있는 활동영역으로(181), 그것의 수행은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인류생활의 기초적인 것, 특히 의식주에서 주제를 찾아야하며, 둘째 몸으로 하는 작업이 중심이 되거나 출발점이 된다. 셋째, 아이가 흥미를 느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지적 탐구이다. 넷째, 이미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자기 자신의 지식을 창조하며, 다섯째, 활동의 선택이나 모둠 편성에 유연성을 갖게 한다(182-4). 그리고 학급편성 역시 이러한 프로젝트 주제에 따라 다음의 네 학급으로 편성되어 있다(45).

키노쿠니어린이마을 공무점: 원예, 건설, 목공, 잡지 만들기
흙투성이군단 모여라: 야채재배, 소 동물 사육
키노쿠니 보도국: 견학, 조사, 신문 만들기
맛있는 것 만들기 모임: 요리 만들기, 먹는 것에 관해 생각함

2-2.
호리는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하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을 뜻한다. 첫째, 감정적으로 해방된 아이(감정의 자유)로, 내면의 억압이나 불안에서 자유(해방)로워지는 것이다. 둘째,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와 능력(지성의 자유)을 지닌 아이로 권위에 기대거나 사회풍조나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 함께 사는 즐거움(자유로운 사회성)을 아는 아이로, 자립한 자아에 기초를 둔 자기주장과 동시에 이웃들과의 풍부한 대인관계를 지녀야 한다(174-5).

끝으로, 다음과 같은 호리의 바람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만큼의 호소력으로 다가설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이 15명이 있다면 그 15명이 저마다 다른 길로 나가기를 바란다. 일류 학교라는 곳으로 가는 아이가 있어도 좋고, 외국에 나가는 아이, 도자기 굽는 곳에 도제로 들어가는 아이, 자동차 정비소로 들어가는 아이, 아버지의 일을 보고 배우는 아이, 한 동안 아무일도 하지 않고 인생을 관찰하려고 하는 아이, 이처럼 다양하게 살기를 바란다. 만일 잘못되어 아이들 모두 똑같이 수험준비에 열을 올려 시험에 합격해 세간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나는 실망할 것이다.”

여전히, 대안학교(교육)와 관련된 내용들이 언론과 책을 타고 소개된다. 겉꾸밈에만 주목하고 내용이 없다는 비판, 특정계층의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비판, 교육 공공성(혹은 공교육)과는 상관없이 소수만의 자기위안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 등 우려되는 점들이 없지는 않지만, 한 측면만을 지겹게 바라보면서 그것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교육에 대한 사유와 상상력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이런 종류의 책들이 좀더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면밀한 검토와 비판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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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쿨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공양희 옮김 / 민들레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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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메리 루(M. Leue)가 뉴욕 주의 알바니 시 중심부에서 시작한 프리스쿨에 관한 이야기로, 프리스쿨의 역사, 모습, 삶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인 공격성, 성, 인종과 계급, 영성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공동체로서의 학교의 한 모델이 되고 싶다는 것"과 “자유와 존중이 동의어이듯 ‘삶’과 ‘배움’이 동의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증명해 보일 것”이라는 말에서 이 학교의 성격을 부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공감하는 바를 소개하면,
우선, ‘단순하고 소박하게Keep it Simple'라는 이 학교의 표어에서도 확인되듯, 참교육(요즘 표현으로 대안교육)이 많은 돈과 세련된 학습도구, 정교한 교수방법과 평가방법을 최우선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프리스쿨의 사명 중의 하나는 첫째, 교육에는 돈이 많이 든다(프리스쿨에서의 학생 일인당 교육비는 뉴욕 주 평균의 약 사분의 일이다), 둘째 고도로 세련된 학습도구(이 학교는 중고 현미경 몇 개와 물려받은 개인용 컴퓨터 여섯 대로 잘 해 나가고 있다)와 다방면에 걸친 전문화된 훈련받은 교사가 필요하다, 셋째 표현력이 풍부하고 세련되게 읽고 쓰는 것은 고도로 정교한 교수법과 평가방법론에 달려 있다는 세 가지 신화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둘째, 이 학교가 주는 메시지는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동기에서 공부할 때, 그리고 지성이 있고 책임 있는 존재로 존중받을 때, 바깥 세계와 격리되지 않고 활기 넘치며 사랑으로 충만한 환경 속에서 마음대로 활동하고 질문할 수 있을 때 가장 훌륭하게 배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에게 진정으로 속하게 될 때,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학업을 성취해 내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서 보내는 그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은 확실히 무의미한 것이 된다.” “배우거나 자라기를 포기하는 아이들은 극히 드물다. 단지 온몸을 묶어 놓을 때 배움과 성장이 매우 어려울 뿐이다.”

셋째,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준다’는 education(교육)의 참 뜻에 따라 교육하는 것이 다름 아닌 대안교육이고 참교육임을 다시 한번 전해준다. “모든 아이들의 내부에는 언젠가는 경의와 충만함으로 피어날 하나의 씨앗이 아직은 딱딱한 껍질 속이지만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는 희망”이 있으며, 우리는 그 씨앗을 키우고 보호하는 일에 결코 무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프리스쿨이 계속 ‘해 나가면서 이루어 가려’는 것이다. 이 점은 아래의 대목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개념의 경계가 사라지는 바로 그 지점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어휘가 긴급히 필요하다. 서구 과학의 낡은 패러다임인 원인과 결과 법칙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하는 대단한 무엇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수준에서 일어나는 상호간의 공동작업의 한 형태라고 인식하게 된 지점에까지 우리의 이해가 확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전 같으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 지식과 기술이 (학생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일깨워지기를 기다린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더 이상 교사가 원인이며 학생은 학습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오래된 학교교육의 대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넷째, 본래 “문제아는 없”으므로,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창조적 배출구를 찾아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현대의 과학적 진단 방식에 의해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수많은 아이들이 보이는 반항은 무지나 성적불량이 아니라 고집스런 개체성과 비순응성이다. 그것이 죄가 되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뿐이다라는 점을 이 책의 글쓴이인 크리스는 고등학교 때 이미 배웠다고 말한다. 공격성의 문제는 신뢰, 공동체 정신의 형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으며, 스스로 갈등해결 방식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외,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 “대부분의 현대 학교가 가지고 있는 통제와 감시, 측정이라는 학습 환경은 온갖 통제의 덫 없이는 어떤 건설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과 불안을 말없이 전해준다.”라는 말 역시 살펴볼만한 대목들이다.

마지막 덤으로, US에서 현재 계속되는 대안교육운동이라는 것이 ‘단 하나의 방식’만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 현재의 ‘어떤’ 교육인가에 있을 것이다.
US에서 현재 자리를 잡았거나 새롭게 시작되고 있거나 이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대안교육의 다양성은 실험을 하고 있는 학교나 가정의 숫자만큼이나 가지각색이다. 예를 들어, ‘인간적인’, ‘자유의’, ‘열린’, ‘새로운’, ‘대안의’, ‘전일적인’, ‘민주적인’, ‘공동체적인’ 같은 말들이 이 다양한 형태의 학교들이 걸치고 있는 형용사들이다. 어떤 이들은 좀더 조직적이고 또 몇몇은 창조성과 자유로운 표현에 역점을 두며, 또 어떤 이들은 사실상의 민주적 과정을 중시한다. 어떤 이들은 완강할 정도로 비정치적인데 반해 일부는 이런저런 정치적 실천과제를 갖고 있기도 하고 좀더 학업 우선의 방향성을 띄고 있는 학교들도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바로 미국인들의 교육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해방운동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칙이며, 온갖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제 나름의 빛을 비추는 이 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를 수 있는 단 하나의 테마는 바로 ‘교육을 하는데 올바른 방법이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이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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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한 교사론 - 내일교육학총서 12
송순재.고병헌.황덕명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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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된 몇 편의 글을 토대로 '아동 이해의 중요성',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몇 가지 예'를 소개하면 이 책의 성격을 일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교사들은 학문적으로 많은 지식을 아는 것보다, 학생을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교사는 남학생과 여학생, 그리고 서로 외모가 다른 다양한 학생들을 대하게 되는데, 모두 나름대로의 특이한 성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학생 각자는 자신의 특성과 기질, 잠재력, 고민, 성장 단계,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이를 좋은 연구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각 연령에 따라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교사들이 인간 존재와 정신세계의 실존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자기 마음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아이들은 화를 잘 내고, 다루기 어렵고, 야단맞기 쉬운 짓을 골라 하면서도 이러한 기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생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사는 늘 심리학 서적을 읽으면서 학생의 행동․정신 활동․동료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의 이러저러한 현상과 문제들을 깊이 있게 사고하고 이해해야 한다.”
“확고한 심리학 기초 지식이 없이는 교육 소양이란 운운할 수 없다. 어떤 교사들은, 심리학은 재미없는 과학으로서 학교에서는 실제적으로 응용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학이 교사의 실제 활동 가운데서 진정한 나침반이 될 것을 바란다......우리 교사들은 모두 학생의 ‘교육감정’을 항상 열심히 쓰는데, 이런 ‘교육감정’을 쓰려면 학생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똑똑히 알아야 하며, 학생의 기쁨과 슬픔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교육감정’의 기초는 바로 심리학적인 분석과 관찰․연구이다.”

“어린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그가 속한 집단과 교사에 대한 그의 태도는 어떠한지, 그는 어떤 경험을 했으며 어떤 일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끌고 나아갈 수 있는지 하는 물음들”을 제기하는 것은 교사들에게 중요하다.

2.
“교사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에서 어린이의 성장발달의 지도방향이 설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연관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교사가 어린이를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고 노력할 수 있는 어린이라고 믿는다면,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특성들이 어린이 안에서 솟아나오고 강화될 것이다......만약에 교사가 어린이를 거짓말쟁이고, 게으르며, 음흉하다고 여기면 그 어린이는 교사가 그를 그렇게 보았던 대로 거짓말쟁이며, 게으르고 음흉한 어린이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는 교사를 가르치며 교육한다. 교사에게 어린이는 자연의 책이다. 교사는 이 책을 읽으며 성숙한다. 우리는 어린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만일 어린이의 ‘이용 가치’를 찾으려 하거나 그에게 결핍된 부분을 ‘평가’해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교육을 필요로 하는 어린이 한사람 한사람에 대하여 애정을 쏟는 일이 요구된다. 이것은 어린이를 모든 교육적인 의도나 모든 의식적인 형성 의지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일단은 어린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 곧 어린이를 그대로 보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기대를 갖고 어린이에게 접근해서, 만일 그 어린이가 기대와 다르게 발달하면 실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린이에게 그 자신만의 고유한 성장발달을 위한 활동의 자유로운 공간을 허용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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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교육하는 이가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 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을 행위의 근거로 삼아야할까? "철학함과 교육함"의 내용을 토대로 답을 내려보자.

“교육하는 이가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 과학이 아니라면,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그는 무엇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며, 만일 어떤 오류를 자백해야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가 제시하려는 바는 교육이 불가피하다는 전제 안에서 철학적 사고가 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함이야말로 교육의 의미를 밝혀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도 미리 규정짓지 않으며, 또한 그에게 귀속되어 있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미리 확정짓지 않는 하나의 행위 형식이라는 점이다......그래서 교육이란 교사가 일종의 안내인 같은 역할을 하는 항해와도 같은 것이다...... 교육함은 어떠한 성과를 확정짓는 혹은 속성을 규정짓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범주로 된 물음의 형식이며, 여기에 교육의 철학적 기원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교육해야하며, 또한 어디로 교육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과학“으로부터”가 아닌 철학“으로부터” 수행하여 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철학함으로부터 교육함이란 교육적 행위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 즉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교육이 지향하는 바에 의하여 숙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왜곡된 길을 가지 않고, 그 대신 어떤 길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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