샨티니케탄 - 평화를 부르는 타고르의 교육도시
하진희 지음 / 여름언덕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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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건 우선, 타고르의 교육론에 대해 얻을만한 새로운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두 번째는 1901년 샨티니케탄(평화의 마을)의 학교에서 출발하여 대학으로까지 발전한 현재의 모습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머리말에 제시된 것이 이 책의 요약문이라 생각되며, 타고르 교육론에 대해 어떤 집중적인 이해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그의 수상집인 [삶의 불꽃을 위하여]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한 교사론]에 실린 그의 글(“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한 교육”이란 제목의)을 읽는 편이 더 좋은 선택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이 책 안에서 잠깐 언급된 김양식님 번역의 [타골의 생애와 사상]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나마 타고르의 교육론을 접하고, 흔히 여행기에서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주변 이야기(혹은 뒷이야기)나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타고르의 학교 역시 카스트 제도라는 당시의 계급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한계를 제외하고, 교육에 대한 그의 신념들 중 몇 가지를 주목하면 “자연Nature”, “영혼”, “자유”, “삶(생활)”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의 교육론과 학교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는 몇 대목들만을 확인해본다.

“타고르의 교육 이상은 인간의 감각을 개발하여 신성함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는 “자연과 접촉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에, 자연과 함께하는 샨티니케탄은 바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곳”이다(하진희, 2004).

“학교는 아이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이 지식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가슴속에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하도록 하는 것이 학교의 역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고 규율보다 자율을, 교실보다 나무 그늘을, 책보다 자연학습을 통해 삶의 지혜를 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 학교의 방침입니다.”(샨티니케탄 초등학교 교사 챠크라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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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는 자연이 주는 교육(education of Nature)의 강한 신념자였으며, 그의 교육은teaching 무엇보다 영혼에 맞닿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그의 학교는 “자유, 더 많은 자유, 언제나 자유(freedom, more freedom, always freedom)”라는 말에 토대를 둔 곳이다(Victor Acker, 2000), 이는 모두 어린 시절 그가 지냈던 학교생활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들의 반영이었다.

참고로, 타고르의 이러한 학교는 당시 유럽에서 움트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학교들(개혁교육운동이나 새교육운동의 맥락에서 묶이는)과 많은 공통점(야외에서의 생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토대를 둔 주요 역할,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self-management, 학습하기 위해 많은 주제를 습득하기보다 지성의 발달을 꾀하는 것, 학습을 위한 어떤 합리적인 일정표)을 지닌 곳으로, 유럽의 교육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를 테면, 그가 강조했던 “자연과 학생들 사이의 접촉”은 당시 프랑스의 개혁교육가였던 셀레스땡 프레네의 교육론에 중요한 일부분으로 짜 넣어진 바 있다(Victor Acker, 2000:37-38).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언급한 “아이들이 늘 자연을 가까이 만날 수 있고, 인내심 있고 친절한 교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더할 나위 없는 교육 조건이라 생각”한 점, “아이들이 학교 주변 마을의 농부, 도공, 직조공, 상인 들이 삶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는 방법을 직접 참여하여 보고 배우도록”한 점,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축제를 열어 아이들이 음악과 춤, 연극과 미술을 함께하도록”하고, “엄격한 규율과 경쟁심 때문에 즐거워야 할 학교 교육이 불행하게 될까 염려해서 초기에는 시험제도를 두지 않았”던 점들 역시 당시의 새로운 학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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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 - 인간지능의 새로운 이해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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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엽 새교육 당시 비네 등이 실시한 지능검사는 전통적인 교육에서 외면했던 “개인차(이를 테면,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와 떨어지는 아이의 구분 등)를 존중하는 교육”을 위한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 바 있다. 아울러, 그 당시는 코메니우스나 루소 등이 제기했던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을 과학화한 발달심리학(혹은 아동심리학)이 활발히 연구된 때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자.
우선, 다중지능이론은 지능을 단일한 지능에 의해 다른 지적인 능력들 모두가 형성된다는 “일반지능(g)”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측정에 의존하지 않는 여덟 개의 상이한 준거들을 근거로 하여, 지능이 다양하고 독립된 지적인 능력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가드너는 “지능이 단일한 능력이고 사람은 “똑똑하든지” 아니면 “둔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신념에 도전”하여, 우리 모두가 언어 지능, 논리 수학 지능, 음악 지능, 신체 운동 지능, 공간 지능, 그리고 인성 지능(대인관계 지능+자성 지능)의 독립된 지능 영역들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인간은 7, 8개에서 12개 정도의 기본적인 지능을 소유한 유기체이고, 지능은 유전, 특정문화와 시대 속에서 제공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며,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양상의 지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드너는 이후에 여기에 자연탐구 지능, 영성 지능, 실존 지능이 추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 영역과 관련해서는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성은 지능의 특정 영역이 아닌 인성, 개성, 의지, 성격에 대한 진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다중지능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명제는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첫째, 우리 모두는 서로 동일하지 않다, 둘째 우리 모두는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곧, 우리 모두는 하나의 종형 곡선을 구성하는 점들이 아니다), 셋째 교육은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기 보다는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려고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곧, “인간 개개인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다중지능이론의 핵심적인 관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단일한 지능적 차원에서 배열될 수 없다”는 것으로, “어떤 단일한 교육적 접근은 오직 몇몇의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일러 준다. 이 역시 지능에 대한 탐구가 “개인차를 존중하는 교육”의 한 근거로 작용할 있다는 측면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세 번째로, 학교에서 “다중지능”이론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스펙트럼 교실”(spectrum classroom)이라는 교육환경의 예로, 이 (유치원)교실은 자연 표본, 말판 게임, 미술 음악 자료 등과 운동, 무용, 집짓기를 할 수 있는 공터를 포함하여 다양한 지능을 활성화시킬 만한 자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에, 아이들은 교실에서 생활하면서 지능에서의 특별한 측면을 보여줄 것이라 가정될 수 있다. 이는 심리 측정들처럼 아이들을 평가 상황에 데려가기보다는 그들에게 직접 가서 평가를 실시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를 끄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능 스펙트럼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평가 중심의 사고”에 빠져 “언어적이다” 또는 “공간적이다” 등으로 아이들을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고무적일 수 있기도 하지만 아이를 구속할 위험이 있다.
둘째, 학생들에게 특정 지능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글쓰기를 하도록 한 후, 그 사람들의 지능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고 수업시간에 발표하도록 할 수 있다.
셋째, 각 지능들을 기본 원리로 하여 방과 후 프로그램을 조직할 수 있다.
넷째, 어떤 학교에서는 상급생들이 다양한 지능들을 활용하여 하급생들에게 특정 개념(지렛대의 기능을 조절하는 원리 같은 것)을 가르치도록 할 수 있다.
다섯째, 특정 지능이 학교활동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이를 테면, 인성 지능에 초점을 둔 학교)
이는 “각 개인에게 맞춰진 교육”, 곧 “개인차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가능한 한 다양한 정신능력에 공평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훈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끝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다중지능의 개념과 실행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다중지능의 개념은 이미 설정된 교육기관의 목적과 의도에 유용한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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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이론은 지능을 과학적 추론능력과 같은 인지능력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동안 주로 재능(talent)이라 인식되던 음악이나 신체운동, 인성 등을 독립된 지능의 영역으로 다양화한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지닌 그러한 다양한 지능의 영역들을 존중하고 개발하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일지능이든, 다중지능이든 지능에 바탕을 둔 “개인차를 존중하는 교육”이 “계층(급)차를 존중하는 교육”을 은폐하는(또는 정당화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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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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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포함한, 윤구병선생님의 몇 가지 책들(이를 테면, 실험학교 이야기, 조그마한 내 꿈 하나, 꼭 같은 것보다 다다른 것이 더 좋아)에서 배운 바를 일부 기록해 둔다.
우선, 교육이란 다름 아닌 “개체생존의 힘(생명체로서 제 앞가림하는 것)”과 “공생(共生)할 수 있는 능력(함께 사는 법)”을 길러주는 것이다.

둘째, 만드는 문화에서 기르는 문화로의 전환이다. 곧, 교환가치(자본의 확대재생산)에서 사용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공동체적 생산양식으로, 자본이 주체인 것에서 자연이 주체인 것으로,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자기증식에서, 순환과 조절, 조화로운 균형으로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에 교육도 기존의 ‘만드는 교육’에서 ‘기르는 교육’으로, 사람도 ‘만드는 사람’에서 ‘기르는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셋째, 좋은 사회란 “있어야할 것들이 있고, 없어야할 것들이 없는 세상”이다. 따라서,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할 것이 있는 사회는 나쁜 사회이다. 나쁜 사회에서 없어져야 마땅한 것들로는 억압, 착취, 전쟁, 불화, 공포, 이기심, 탐욕, 증오 등이 있고, 좋은 사회에서 있어야 할 것들로는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사랑 등이 있다. 이에 없어야 할 것을 가려내어 그것들을 없애는 일에 앞장서고,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좋은 사회가 되려면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것을 땀 흘려 만들어내는 창조와 건설의 힘을 동시에 지닌 아이들이 요구되는데, 이런 능력을 지닌 아이들을 글쓴이는 “비판의식에 충만한 파괴자”라 부른다.

넷째, 아이들의 감각능력과 표현능력을 온전히 길러주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곧, 감각기관을 통해서 외부의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교육(감각교육)과 우리 몸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력을 밖으로 드러내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교육(표현교육).

다섯째, 감각능력의 키움을 비롯하여 사람은 자연 안에서 ‘자연의 아들’로 길러져야 한다. 인간의 힘이 자연력의 도움 없이도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으로, 사람 마음속에 깃든 자연과 바깥 세계를 이루는 살아 숨쉬는 자연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생기를 얻을 수 있다. 이에 아이들이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고루 익히고 경험하는 일이 중요하다.

끝으로, 이상의 문제의식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다음의 대목으로 짐작해 본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학교가 보편화 한 것은 200년도 채 안 된다. 그 동안 학교 교육은 산업 사회의 성장,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확대, 종교와 이념의 전파를 위해 크게 기여해온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처신해야 이웃과 편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무엇을 어떻게 기르고 생산해내야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수 있을지, 우리 감각을 어떻게 개발해야 외부의 자연과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본성) 사이에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우리의 인지능력은 어떤 학습을 거쳐야 지속적으로 커나가고 강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살면 우리의 소질이 노래로, 그림으로, 춤으로, 글로, 기술이나 예술의 성과 싱그럽게 꽃피어날 수 있는지,.....이런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은 ‘학교’라는 제도 교육의 틀 안에서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거니와 이루어진다 해도 겉핥기로 스치고 말 뿐이었다.
이것은 제도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의 잘못이나 운영 잘못으로 생겨난 문제만은 아니다. 근본 문제는 ‘학교’라는 기구과 자연과 삶터에서 동떨어져 실험실 형태로 유지되어온 데에 있다.”

자연과의 접촉, 감각교육과 표현교육의 중요성 등은 이오덕선생님과 이호철선생님의 책에서도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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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
에버하르트 뫼비우스 지음, 김라합 옮김 / 보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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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일간지에 실린 바 있는, 윤구병선생님의 인터뷰 내용에서 본 다음의 대목을 계속 생각나게 했던 책이다. “만약 변산 공동체의 삶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더 행복하다면 이 세상이 변산 공동체처럼 바뀌어야지 아이들보고 세상에 적응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선 책의 일부 대목들을 토대로, 벤포스타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벤포스타는 실바신부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곧, “좀더 나은 세상, 좀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아이들뿐”이므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사회 행동 방식을 연습시키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을 가장 효과 높게 전달함으로써, 반드시 필요한 변화를 추구하는 일에 아이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아이들 손에 무기를 쥐어 주”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지금까지 해 온 학교 교육이나 가정교육으로는 안 되고, 아이들이 손수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관리하는 어린이 나라를 세워야” 가능하다. 이에, 그 곳은 “조숙한 아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삶과 동떨어진 낡은 생각을 어른들로부터 이어받아 되풀이하는 성인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궤도 위에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독립조직이다.”

둘째, “어린이 공화국의 기본이념은 이미 만들어진 지금의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개선하는 것”으로, “낡고 썩은 문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새로운 정신으로 지금 사회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다.”

셋째, 이 곳의 교육경험은 통합된 것으로,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학문 훈련을 받으며, 하루 두 시간씩 자기가 고른 일터에 가서 일을 하며 손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정치적 가치를 형성하며 인간성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축은 종합되어, 변화를 위한 교육이자, 변화의 의식을 지닌 사람을 기른다.

넷째, 이러한 어린이 공화국의 목표와 내용을 경험하면서, 학생들이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거대한 교육 사업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겪게 되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홀가분해질 수 있다. 곧,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저항이나 공격, 수업 거부 같은 것은 기꺼이 단념할 수 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학교든 아니면 여타의 교육기관이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최소한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일을 결정할 때 우리에겐 우리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른은 우리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제12조의 내용만이라도 지켜지는 사회였으면 한다. 이 조약은 1989년 11월 2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우리나라는 1991년 이 조약에 가입했다. 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은 해당 가입국에 그 이행의 의무가 있는,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 것이다. “아이들이 손수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관리하는 어린이나라” 혹은, 아이들의 자립과 자치,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는 아이들의 인권이 보장된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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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는 학교가 아니다
강대중 지음 / 학이시습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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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공교육이 지시하는 학교와 학부모가 원하는 학교의 타협과 갈등’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현행법령에서 나타나는 혹은 나타날 수 있는 갈등 상황을 여러 대안교육기관을 소개하면서 다루고 있다. 대안학교에 대한 구분을 교육주의적, 학습주의적, 제도화형, 제도이탈형의 선으로 그리며 열 가지로 유형화하고 있지만 그리 의미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언제부턴가 쏟아진 많은 대안교육관련 논문들에서 보여지듯 대안(교육)에 대한 철학적 깊이나 성찰이 느껴지기보다는 외형에 대한 단순한 기술, 대안학교에 대한 단순한 나열식 소개가 주는 건조함이 여기에서도 느껴진다. 근데, 이 책의 성격이 제도적 측면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초점이 어긋난 것일 수도 있겠다. 대안교육을 교육주의와 학습주의의 시각에서 논의한 것은 김신일교수 논지의 연장선이라 생각되며, 대안학교에서 의무교육 등 학교교육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상황을 현행법령과 관련시켜 논의한 점은 하나의 참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가 한국대안교육의 출현을 교육주의(교육권)와 학습주의(학습권)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해결해야할 쟁점으로는 무엇을 제시하는지만 간략히 살펴보자.
한국의 대안학교는 강력한 국가 교육권이 행사되는 교육 제도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출현하였으며, 의무교육 제도, 학교의 설립 및 인가, 교사의 자격 통제, 국가 교육과정, 검ㆍ인정 교과서 제도 등은 학부모나 학생의 학습권보다는 국가의 교육 실시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교육은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 이는 산업 사회와 함께 정착된 근대 공교육 제도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이에 한국 대안교육의 다양한 흐름 중 상당수는 교육 당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의무로 부과되는 공교육을 선택의 문제로 인식하여, 공교육에서의 이탈을 꾀한다. 아울러, 한국의 구체적인 교육현실 역시 교육권의 시대에서 학습권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고, 대안학교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곧, 대안학교의 출현은 교육주의에서 벗어나 학습주의로 전환하려는 하나의 흐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대안학교가 정착되기 위해 글쓴이는 검토해야 할 몇 가지 쟁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첫째, 국가가 교육과정을 지정하고 교과서를 검ㆍ인정하는 국가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 둘째 의무교육을 의무 취학으로 해석하는 현행 법령의 문제, 셋째 더욱 근본적으로 다양한 학교가 출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학습자 중심으로의 교육 제도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대안교육과 기존의 교육 제도는 심각한 갈등을 빚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기존의 교육제도와 갈등이 없다는 것은, 결국 ‘대안’학교이기보다는 단지 제도권안의 또 다른 학교일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며, 오히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갈등 상황을 없애는 문제보다는(이 자체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교가 정말로 ‘대안적’ 교육철학을 갖고 있는지와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신념의 고수와 내용을 확보하는 일이란 생각이다. 곧, 제도적 정착보다 ‘대안적’ 철학과 내용의 정착이 더욱 시급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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