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가 있었다.

한남동,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야경이 꽤 근사한 곳에서 나는 맥주와 와인을 마셨고..

얼마뒤면 1년간 뉴질랜드에서 지내게 될 그녀와 이제는 다섯살짜리 딸아이의 아빠가 된 그를 만났다.

술자리가 일찍 파하는게 아쉬워 그와 나는 반포의 모처 아지트로 찾아들어 산사춘 두병을 비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그 추억들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집에 오는 택시안에서 나는 조금 들떠서 지금의 내 누군가에게 한참 떠들어댔다.

꽤 많이 마셨는데 생각보다 취기가 돌지를 않는다.

차라리 취하고 싶은 밤인데...

무엇에 이리 긴장하여 양껏 마시고 더 마셨는데도 이렇게 말짱한 것일까.

나는 두려운게 너무 많은 사람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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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3-03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다 풀어헤치고 싶은데 그게 참 안 돼요. 낡은구두님, 좋은사람들이랑 좋은시간 가지신 것 같네요.

실비 2006-03-0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취하고 싶을때 먹어도 안취하고 안취하고 싶을때 취하고 그게 술인가 봅니다...

gazzaa 2006-03-0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이 되서 여전히 안먹긴 하지만, 술, 그까이꺼 못먹을 것도 없지 않겠어? 지금은 몸이 딱히 어디가 아픈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라는 생각을 가끔하긴 하지만. 결국 못먹고 마는 것은 그게 무서운 거지. 내속에 뭘 기르고 있는지 잘 모르니까.

이리스 2006-03-0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 넵, 간만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
실비님 / 핫,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시에나님 / 나는 물혹같은 걸 기르다가 그만.. ㅠ.ㅜ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사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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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린도후서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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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날, 하늘은 잔뜩 흐렸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매여 시달리다가 11시가 다되어갈 무렵에서야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바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자리를 옮겨 다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었습니다. 마술을 구경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웃었고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더랬습니다. 그렇게 오래 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떠들어대다 보면 묘한 기분이 됩니다. 단지 언어가 다를 뿐이지만 말을 하는 주체인 나 자신도 조금은 바뀌는 것 같습니다.

꽤나 많은 맥주를 속에 들이붓고 취해서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양쪽 정강이가 까지고 멍이 들었습니다. 짙은 보라색 스커트에 보라빛과 검은빛이 적당히 섞인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곳에 있던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뻔 하기도 했지요. 일행이 말려서 별탈 없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엉망이었던 밤이었습니다.

겨우 서너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지끈거리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눌러가며 극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본 <브로크백 마운틴>은 엉망인 밤을 극복하고도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는, 너무 가벼워지다 못해 곧 부서져버릴 것 같은 내 인생이 불안해서 몸부림치던 지난 밤의 고통을 그대로 지고 앉아 이 영화를 본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저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거구나, 보는 내내 동경하고 또 동경했습니다.

나는 성기가 망가지고, 두들겨 맞아 죽을 위험한 사랑을 하고 있는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겁하기 짝이 없고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요. 한 남자를 사랑하고 20년을 기다리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남자, 그 남자를 그렇게 만든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던 또 다른 남자. 진실한 사랑이 오랜 세월 기다리다 결국 그렇게 죽고난 뒤에야 그는 울며 말합니다. I swear.

한참을 생각해보았지만 그처럼 말하지 못할것 같습니다. 어떤 맹세같은 걸 할만한 준비가 여전히 안되어 있을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건 간에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비난받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난 뒤 외면 당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사람이, 과거에서 현재로 어느 날 불쑥 찾아들어왔고 결국 이제는 기회를 달라며 이전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일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십니까? 물에 빠져서 죽을뻔 하다 가까스로 살아난 기억 때문에 두번 다시 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같은 기분입니다. 아무리 이제는 위험하지 않다고 곁에서 말해주어도 몸의 기억과 그 때의 고통의 기억이 본능적으로 제어합니다. 그는 내 두려움을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약속을 했으나 나는 그 약속에 아무런 답변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인생을 망치는 것들은 외부에서 온다기 보다는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는 것에서 그 어디로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부의 그것을 나는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게 아니라 알고도 못하기에 이제는 포기하는 일밖에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용기가 없어 그를 20년이나 기다리게 만드는 저 한심한 남자의 꼴이나 저나 별다를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그리고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나는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정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명확하게 알면서도 그대로 할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자니 그 또한 역겹기 그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욕심이 많고 거기에 겁까지 많아서 그런것입니다.

모든 판단들이 유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약해빠진 여자입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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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3-0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쌩뚱 맞은 말이지만....퍼온 글인지 알았어요.정말 잘 쓰네요.^^
사랑을 찾으시길, 글에 쓰신 사람이 아니라도 마음을 열고 사랑을 하시길....바랄께요.

프레이야 2006-03-0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로크백 마운틴, 기회가 되면 보고 싶어지는 영화네요. 님의 글도 감정도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추천 꾸욱~

물만두 2006-03-0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렵기도 한 것인가 봅니다. 죽을만큼 사랑할 수 없는 저도 그 감정을 알 수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이리스 2006-03-0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 핫, 그러셨군요. ^^ 네.. 감사합니다.
배혜경님 /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보심이.. 어떨까요. ^^ 추천 감사해요.
물만두님 /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도 될런지요.. --;

마태우스 2006-03-02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 영화를 봤습니다만, 님처럼 멋진 영화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아름다운 예술이 고통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네요. 구두님, 이제 그만 웃으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있잖아요

이리스 2006-03-0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 아, 님도 보셨군요. 웃기는 웃고 살지요. ^^;;
 

 

늙는다는 것.. 어느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서른 고개를 넘으면서는 그냥 서서히 물들듯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이런게 늙어간다는 것이구나 하는 것. 20대 중반에는 늙는다는 표현 대신에 나이가 든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30대를 넘어서게 되자 나이가 든다기 보다 확실히 늙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대학 졸업하자 마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셨으니 지금의 내 나이에 이미 학부형이고도 남으셨다. 아마도 나 역시 25~6세에 결혼해서 아이를 바로 가졌더라면 지금 낼모레면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확실히 늙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건 나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20대 후반에는 어떨것이라는 생각과 대강의 그림이 있었을 뿐 그 이후에 대해서 미래의 내 모습은 아무런것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처절한 암흑기가 몇번이나 있었으니 머리 속이 백지로 변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40 언저리의 나를 그려낼수가 없다. 어떠한 그림도 떠오르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해볼 수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40언저리는 물론이거니와 40 이후의 그 너머의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마음에 품은것 조차도 알 수가 없다.

 

직장 생활 같은것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라 아직도 지금의 내가 낯설기 짝이 없다.

참 오래도록 내 옷이 아닌 것을 입고 묵묵히 그 불편함을 견디는 이런 기분. 팔은 너무 짧아 보기 흉하게 손목위로 올라오고 바지는 길어서 땅에 끌리며 허리는 지나치게 조여와 숨쉬기 곤란한..

 

문제는 이 옷을 벗어던지면 당장은 남루한 속옷차림으로 비바람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옷 대신에 내 몸에 잘 맞는 편안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좀더 인내해야 한다.

 

나는 스무살 무렵, 앞으로 자기가 뭘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어떻게 저따위로 살아가는 것일까.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거나, 혹은 뭘 하고 싶은지는 알아도 그냥 알기만 하고 흘러가듯 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나는 그 경멸의 대상, 중심에 서 있다. 일전에도 쓴바 있지만 스물의 내가 서른둘의 나를 경멸하고 있어서 나는 무척 부끄럽고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다.

저 시선, 좀 거두어 주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내가 참으로 무능력하고 한심하다.

 

늙는다는 것은 점점 더 단단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세계가 더 단단해져서 다른 무엇이 들어오기가 힘들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물렁해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물렁해져서 그만 이것저것 마구 섞여 들어오고 그걸 제대로 솎아내지 못해 덤벙거리며 우왕좌왕 하는게 지금의 나다.

 

늙는다는 것이 두렵거나 불편한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결국 또 외롭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외로운 게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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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2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프레이야 2006-02-2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으로부터 십년쯤 후에도 비슷한 심리양상이랍니다. 저도 이십대엔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전 아직 외로운 감정이 정말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철이 안 들었다는^^

이리스 2006-03-01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 네.. -_-;
배혜경님 / 우와, 외로움을 초월하신게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