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마지막날, 하늘은 잔뜩 흐렸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매여 시달리다가 11시가 다되어갈 무렵에서야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바에 가서 맥주를 마셨고 자리를 옮겨 다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추었습니다. 마술을 구경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웃었고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더랬습니다. 그렇게 오래 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떠들어대다 보면 묘한 기분이 됩니다. 단지 언어가 다를 뿐이지만 말을 하는 주체인 나 자신도 조금은 바뀌는 것 같습니다.

꽤나 많은 맥주를 속에 들이붓고 취해서 그만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양쪽 정강이가 까지고 멍이 들었습니다. 짙은 보라색 스커트에 보라빛과 검은빛이 적당히 섞인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곳에 있던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뻔 하기도 했지요. 일행이 말려서 별탈 없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엉망이었던 밤이었습니다.

겨우 서너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지끈거리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눌러가며 극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본 <브로크백 마운틴>은 엉망인 밤을 극복하고도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는, 너무 가벼워지다 못해 곧 부서져버릴 것 같은 내 인생이 불안해서 몸부림치던 지난 밤의 고통을 그대로 지고 앉아 이 영화를 본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저렇게 살아갈 수도 있는거구나, 보는 내내 동경하고 또 동경했습니다.

나는 성기가 망가지고, 두들겨 맞아 죽을 위험한 사랑을 하고 있는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겁하기 짝이 없고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요. 한 남자를 사랑하고 20년을 기다리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남자, 그 남자를 그렇게 만든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던 또 다른 남자. 진실한 사랑이 오랜 세월 기다리다 결국 그렇게 죽고난 뒤에야 그는 울며 말합니다. I swear.

한참을 생각해보았지만 그처럼 말하지 못할것 같습니다. 어떤 맹세같은 걸 할만한 준비가 여전히 안되어 있을뿐 아니라 그게 무엇이건 간에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비난받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난 뒤 외면 당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사람이, 과거에서 현재로 어느 날 불쑥 찾아들어왔고 결국 이제는 기회를 달라며 이전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일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십니까? 물에 빠져서 죽을뻔 하다 가까스로 살아난 기억 때문에 두번 다시 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람같은 기분입니다. 아무리 이제는 위험하지 않다고 곁에서 말해주어도 몸의 기억과 그 때의 고통의 기억이 본능적으로 제어합니다. 그는 내 두려움을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약속을 했으나 나는 그 약속에 아무런 답변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인생을 망치는 것들은 외부에서 온다기 보다는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아는 것에서 그 어디로도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부의 그것을 나는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게 아니라 알고도 못하기에 이제는 포기하는 일밖에 없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용기가 없어 그를 20년이나 기다리게 만드는 저 한심한 남자의 꼴이나 저나 별다를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그리고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나는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정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명확하게 알면서도 그대로 할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자니 그 또한 역겹기 그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욕심이 많고 거기에 겁까지 많아서 그런것입니다.

모든 판단들이 유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약해빠진 여자입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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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3-0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쌩뚱 맞은 말이지만....퍼온 글인지 알았어요.정말 잘 쓰네요.^^
사랑을 찾으시길, 글에 쓰신 사람이 아니라도 마음을 열고 사랑을 하시길....바랄께요.

프레이야 2006-03-0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로크백 마운틴, 기회가 되면 보고 싶어지는 영화네요. 님의 글도 감정도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추천 꾸욱~

물만두 2006-03-0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렵기도 한 것인가 봅니다. 죽을만큼 사랑할 수 없는 저도 그 감정을 알 수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이리스 2006-03-0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 핫, 그러셨군요. ^^ 네.. 감사합니다.
배혜경님 /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보심이.. 어떨까요. ^^ 추천 감사해요.
물만두님 /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도 될런지요.. --;

마태우스 2006-03-02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 영화를 봤습니다만, 님처럼 멋진 영화평을 쓸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아름다운 예술이 고통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네요. 구두님, 이제 그만 웃으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있잖아요

이리스 2006-03-0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 아, 님도 보셨군요. 웃기는 웃고 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