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바쳐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가 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때문에 결심했다 될수록이면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불란서의 루오 할아버지같이 그렇게.

-이바라기 노리코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리스 2006-04-2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과거형이 아니라.. 젊음이 가득했던 이십대 초반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알게되기 시작한 삼십대 초반.. 지금인것 같다.

하늘바람 2006-04-2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낡은 구두님, 님 이야기 아니었어요?

Kitty 2006-04-2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예뻤을 때라고 하셔서 사진 올라온 줄 알고 얼른 뛰어왔잖아요 ^^;;;;

비로그인 2006-04-2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tty님 말씀에 동감하는지라, 위대한 시 앞에서 망측한 독자가 된 기분입니다.^^;;;

이매지 2006-04-2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쿨럭^^;;

gazzaa 2006-04-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재미나요오오. ㅋㅋ)

이리스 2006-04-2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 헙.. ㅎㅎ
키티님 / 이런이런, 죄송합니다.. ^^
쥬드님 / 망측한 독자.. 라니.... 하핫.. 한참 웃었어요.
이매지님 / ㅋㅋㅋ
시에나님 / 재미있으면 추천을 하세요오오~

비연 2006-04-26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네요^^
사실, 저도 낡은구두님 '젤로 이뻤을 때 사진'이 있는 줄 알고 냉큼 왔지만^^;;;

이리스 2006-04-2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 앗.. ㅋㅋ 죄송해요.

프레이야 2006-04-2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예뻤을때는... 단연 40대초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