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아주 대단한 하루를 보냈다. 대단한 이동이었다 그건.

부천 -> 용인(수지) -> 파주(헤이리) -> 홍대입구 -> 회사...

경기도 순회였다고 봐야 옳다. 더구나 차도 없이 대중교통으로 거의 다 움직였다.

이런 엄청난 이동과 외근에 더불어 드라마틱한 일이 또(또라는 건.. 내 인생 자체가 하도 드라마틱해서 웬만한 드라마틱한 사건에는 놀라지 않아서다) 일어났다.

늘 차로 헤이리를 가는 바람에 대중교통 이용하여 가기란 쉽지 않았다. 대화역에서 내려 헤매다 어찌어찌하여 일산의 모 유명 거리로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가 길을 잃어 잘못 들어선 그 길에서 8년전에 헤어진 옛사랑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절묘한 순간이었고 나만 그를 보았다. 그는 다른 이와 이야기중이었으므로.

싸이의 위력이란 참으로 대단하여 나는 몇 개월전에 그의 싸이를 알게 되었고 덕분에 약간의 근황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나도, 그도 싸이에 별로 올려놓은 것도 없으니 그게 다일수밖에.

나는 길을 잃었고, 8년전의 옛사랑과 조우하였으나, 갈길이 바빴다. 길을 건너 그가 보이는 맞은편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고, 나는 그 곳을 그렇게 떠났다.

짧은 시간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에는 온갖 영상이 다 스쳐지나갔으며 변함없이 착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아렸다. 택시에 타고 헤이리로 가는 동안 울렁거리는 가슴 때문에 얼굴이 벌개질 지경이었으니 진정하기 위해 바라본 창밖은 또 왜 이렇게 스산한지. 바람에 마구 떨어져 흩날리는 낙엽들이 내 정신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그를 처음 알았던 것이 열아홉의 가을이었으니 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함께 연기 수업을 받았고 몇몇 친구와 함께 어울리다가 그와 나는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다. 우리가 맺어준 서로의 친구들의 인연은 또 얼마나 오래 이어졌던가. 함께 연기 수업을 받던 친구들 중 한 명은 이미 유명한 뮤지컬 스타가 되어있고, 나는 이 길에 들어섰으며 그는 무용을 전공하였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12년전의 가을로 점프하여 돌아갔던 내 기억은 8년전 겨울에서 끝이 났다. 거기가 우리의 끝이었으니까. 그 끝의 기억에서 나는 눈물이 흐를뻔했다. 나의 못되고 철없었던 이기심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고 수없이 혼잣말로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어리석은 짓인줄 알면서. 그건 다시 뭔가를 되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었다기 보다는 내 마음 편하자고 혼자 웅얼거리는 일종의 의식같은 것이었다.

넌, 여전히 따뜻하구나. 그 웃음은 이렇게 눈이 부셔서 길 잃은 내 정신없는 시야에도 한 눈에 들어와 박히는구나. 그래, 이걸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8년만에 마주친 것이 이 인연의 마지막이라고 기억해두자. 언젠가 어디서 또 다시 마주치기 전에는 우리 다시 만날 일이 없을테니까.

고맙고 또 미안하다. 나한테 가슴 아프도록 행복한 추억이란걸 남겨줘서, 죄책감이란 것도 함께 갖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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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2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가을의 끝자락에 터진 '사건'이군요. 앞으로는 '죄책감'을 뺀 추억으로만 간직하시길.

이리스 2005-10-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건인것 같아요. 사실 죄책감이란 단어도 참 이기적이네요. 써놓고 보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저런 단어를 붙였는지 원....

이매지 2005-10-2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혹여나 길가다 마주치면 어쩌나 싶어요. 아직 그래본 적은 없는데 아마 엄청 혼돈스러울 것 같은...

진주 2005-10-2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 구두님, 가슴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이네요.
추억이 추억으로만 머물지 않고 이렇게 가끔 현실로 출몰해 줄 수 있는 것만해도 님은 행운아^^

이리스 2005-10-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 골목을 돌아나갈때 딱! 마주칠수도...
진주님 / 아, 그런가요. 네.. 그렇게 생각해야겠어요. ^^

비연 2005-10-2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라도..마주치고 싶은 사람이 저에게도 있는데....

이리스 2005-10-2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네, 그렇게 마음에 품을 추억이 있다는것이 행복한것인지도. ^^

기인 2006-11-0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다. 축체처럼 웅성거리며 걷는 사람들 속에, 달은 비스듬히 걸려
^^ ㅎㅎ 예전에 낯선 도시에서 밤에 길을 잃고 나서 끄적였던 것이 있는데 문득 생각나네요. 신비한 체험이었던 것 같아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은. 딱히 갈데도 없고, 길을 잃었다는 체험 자체를 즐기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계속 걸었던 기억이...
괜히 딴 소리 끄적이고 갑니다 ^^;ㅎㅎ

이리스 2006-11-0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 흐흐.. 갑자기 몽환적인 분위기로~ .. 사실 저는 그때 워낙 경황이 없긴 없었던지라.. 아무튼 참 신기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