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의 극한을 체험해볼 수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로 춤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로등불 아래 모여들어 생명을 내걸고 광란의 군무를 추는 나방들처럼 춤판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정신없이 황홀해질 수 있다. 거역할 수 없는 반대 급부의 명제로서, 황홀은 어김없이 숨막히는 허무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지만. 그러나 황홀이 되었든 허무가 되었든, 춤판에서 느끼는 극도의 감정들은 독서를 통해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경지의 체험인 것 같다.

 

활자의 세계가 극지방의 풍광처럼 날카롭고 정적인 반면에, 춤판은 공허조차도 열대의 기후를 닮았다. 춤판에서 발원하는 정서는 그것이 어떤 종류가 되었든 원색적이고 자극적이다. 에밀 시오랑과 앙드레 지드와 전혜린조차도 춤판의 세계에 비하면 차가운 활자로 박제되어버린, 고운 자태로 굳어버린 정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구두점과 서술형의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절규도, 환희도, 비합리성도, 광기도 가차 없는 동결건조의 과정을 겪게 되고 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만지면 만질수록 부수어지고 마는 마른 낙엽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과 맺은 관계이든, 지난날 알 수 없는 열기에 사로잡혀 광적으로 쌓아 올렸던 모종의 내적 세계이든, 추억이든, 장소든... 나에게는 그 중 하나가 아무래도 춤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붉게 이글대는, 혹은 물기를 머금고 살아 날뛰는, 오로지 춤판에서만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었던 생명과 격동의 기운을, 지킬의 가면을 벗어던진 하이드들의 성난 축제를, 육신의 전부를 제물로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고귀하게 느껴졌던 그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이제는 이렇게 골방에 엎드려 등 굽은 노파처럼 끼적대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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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5-08-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스윙에만 국한시켜야 할 것 같다. 탱고는 좀 다른 것 같다.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 시간의 숲에서 고대 중세 근세의 문화영웅을 만나다
최정은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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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는 ‘트릭을 부리는 자’, ‘기쁨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칼 융의 꿈 이론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원초적 상징들 가운데 하나다. 트릭스터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심리학적 삶에 있는 반항적 에너지로서, 그는 언제나 기존상태를 부인하거나 의문시하고 잘 돌아가는 체제에 제동을 걸고 심지어는 한창 승리감에 차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비웃고 미래의 재난을 예언하길 즐긴다. 그는 아무런 분명한 도덕률도 갖고 있지 않고, 무너뜨리고 조롱하고자 하는 충동 외에는 어떠한 일관된 규약에도 매여 있지 않다.

 

라고 구글에서 만난 한국게슈탈트심리치료연구소 안진봉 씨는 말하고 있다. 트릭스터는 르네상스 시절 배타고 떠돌아다니다 17세기에 일시에 수용소에 감금되어버린 푸코의 광인들과도 일치하는 캐릭터다. 그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제의의 희생물이고, 콜린 윌슨이 말하는 아웃사이더이며,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우리의 향락을 절도해가서 불가해한 과잉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오늘날 의학적 분류에 따르면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들도 트릭스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칼 융을 비롯한 과거 학자들은 트릭스터가 인간 정신의 열등한 면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경시했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인 오디세우스와 프로메테우스까지도 트릭스터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 보다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책도 트릭스터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장난꾼 트릭스터는 규칙을 깨어가는 방식으로 새로운 규칙을 정립하며 장을 확장해간다. 그는 항상 고픔에 시달리며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누구나 한시적으로 주어진 규범의 한계를 넘고자 할 때는 트릭스터가 된다. (...) 웃음과 기쁨을 가져오는, 정의되기 힘든 그는 왕이자 광대이며, 모자람이자 과잉이고, 웅변가이자 은둔자이고, 현인이자 바보이며 (...) 방랑자이자 혁명가이다. (...)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이며, 항상 길을 떠나는 여행자이고 (...) 한계선에 선 유목민이다.”

 

경계인이자 주변인. 농담으로 규범을 깨버리는 자. 장난치고 웃음짓게 하는 희생양. 미숙하면서도 교활한 영웅. 그물망에 걸려들기는커녕 그물의 조직을 변형시켜버리는 불온한 미학의 창조자. ‘포획되지 않음’이 그 존재의 유일한 본질인 자. 영원한 결핍이자 영원한 잉여인 '대상 a'의 신화적 원형. 탈주하는 욕망... 이쯤되면 가히 사표로 삼을 만 한 미래적 인간의 전범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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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새롭게 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개운할까. 한 살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지난날에는 그 누구의 생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리셋, 그러니까 의식훈련을 통해서 머릿속에 누적된 과거를 자체적으로 소각해버리는 작업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의식의 표층 정도는 의지에 따라 재량껏 정돈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군가의 기억에 침투하여 거기 어떤 형태로든 잔존해 있을 내 과거의 모습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소망인 것이다. 탈퇴를 해도 게시판 작성 기록은 남아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때로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불쾌한지. 이 이상한 결벽은 뼛속까지 이기적인 성질의 것이어서,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고 다녔던 지난날의 행실에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굴욕감과 수치심에 비하면, 그동안 내 부덕의 소치로 인하여 타인이 입었을 피해와 상처에 대한 회환 따위는 일순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일에 걸쳐 옷가지를 비롯한 일체의 소지품들을 계획적으로 처분하고 휴지조각 하나 없는 텅 빈 방에서 목매단 채로 발견된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언젠가 신문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자살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그녀의 결벽 만큼은 이해가 간다. 목매달기 전 그녀에게 딱 한 가지 미련이 있었다면, 그것은 타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자신의 기억까지는 끝내 치우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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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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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하는 인간'마저 대상화하여 재사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마치 서구 문명사가 수행하는 인류적 차원의 위빠사나 명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땅에 발 딛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푸코는 상아탑에 갇힌 명상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비폭력-아나키스트였다. 자유와 주체의 가능성들을 옥죄는 모든 규범과 권력에 대해 푸코는 단체를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하면서 ‘행동’으로 저항했다. 그는 여러 정치적 현장에서 사르트르와 함께 있었고, 때로는 체포되기도 했으며, 자유의 나라 미국에 가서는 각종 마약을 섭렵하고 SM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가 결코 냉소적 회의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평생에 걸쳐 자유를 통제하는 모든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불복종함으로써 오늘의 세계와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그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2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 미세한 진동, 기능장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푸코의 고백처럼, 그에게 ‘텍스트 밖에서의 삶’과 ‘텍스트’는 상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푸코를 냉소적 회의주의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피상적 독법이 낳은 속단일 것이다. 섣부른 낙인찍기일 것이다.        
   
3

<광기의 역사>가 세상에 나왔을 무렵 데리다는 “선생님의 주제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뭐랄까 이성예찬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면서 푸코-데리다 논쟁의 포문을 연다. 요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주체를 세우기 위해 꿈과 오류는 회의의 대상으로 고려했지만 광기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그럼으로서 광기는 철저히 논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푸코의 해석이 “순진한” 독법이라는 것. 데리다는 “한 텍스트를 하나의 ‘역사적 구조’ 안에, 다시 말해서 ‘역사의 전체적 기획’ 안에 집어넣으려는 이러한 독서방법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그 자체가 ‘합리주의와 양식에 대한’ 폭력”이라고, “구조주의적 전체주의는 여기서 고전주의 시대의 폭력적 감금과 비슷한 감금을 코기토에 대해서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일갈한다. 일견 사소하고 지엽적인 태클 같지만, 푸코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을 구성하는 상징적인 언표임을 감안할 때 이는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푸코가 최초로 보인 반응은 사뭇 감동적이다. 그는 데리다가 “아주 철저하게 핵심을 짚고, 정확하게 문제를 부각시켜 나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사유를 내게 열어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잠시 관대한 호인의 면모를 보여주던 푸코는 이내 변심하여 데리다가 고작 세 페이지 가지고 자신의 철학적 기획 전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한다. 그리고 정작 포커스를 두어야 할 지점은 담론적 실천이 수행되는 변형의 장 속에 코기토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인데, 들뢰즈가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적 흔적으로 환원해버림으로써 담론적 실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렸다고 힐난한다. 비단 데리다가 맞더라도 담론적 실천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건들이지 철학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

 

4

“<지식의 고고학>에서 (...) 견해와 과학적 인식 사이에서 아주 특별한 층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앎의 층위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이 앎은 이론적 텍스트나 경험의 도구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천과 제도 안에서 실체화된다. 그러나 이 앎은 이 모든 실천이나 제도의 단순한 결과나 반쯤 의식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앎은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나타낸다. (...) 앎의 발전과 변화는 인과성의 복합적인 관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어떤 에피스테메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앎들이 제도적 실천의 단순한 결과도 아니고 의식적인 표현도 아니라면, 고유의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와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권력의 장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속성 역시 에피스테메에서의 앎들의 속성과 마찬가지 아닐까.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도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메커니즘 속에서 자기 고유의 규칙을 정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푸코가 어떤 인터뷰에서 “자유가 없다면 권력 관계도 없다”고 했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권력은 상호작용이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개체도 비록 권력의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응당 자유로워야 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개인’을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양태’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타동적지만, 그래서 ‘부자유’하지만, 동시에 양태는 ‘자유롭게’ 변용된다. 실체의 속성을 분유하면서 무한하게 변용되는 것이다. 푸코의 개인들 역시 권력의 속성을 분유하며 자유로이 변용됨으로써 진리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라면,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앎이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듯이, 우리도 우리 고유의 변용의 규칙들을 옹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들이 돋아나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해낼 여력은 못 되고, 아직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푸코와 스피노자의 교직이 가능하리라는 예감이 든다는 것, 그리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내가 느꼈던 기분이 숨막힘과 답답함이 아니라, 충만과 기쁨이었다는 사실이다.               
   
5

성의 역사는 원래 4편까지 기획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 다음에 기독교 초기의 성 담론을 분석한 <육욕의 고백>이 있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현재 출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푸코는 자신이 작성한 ‘안내문’에서, <성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그러나 19세기 초 이전에는 없었던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이 서구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오랜 침묵 끝에 말년의 푸코가 돌연 현세를 초탈하여 고대로 떠나버린 듯이 비치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의 불시의 죽음에서 기인한 착각일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근대 사회의 욕망하는 개인들을 해부하기 위해 그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시대로 잡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욕망하는 개인’의 고고학-계보학적 탐사를 (비로소 막)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섹슈얼리티’는 ‘광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거시적인 조망, 총체적인 가늠을 위한 하나의 특징적인 지표이자 샘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푸코는 거시적으로 무엇을 조망하려 했을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쩌면 푸코는 주체에게 있어 ‘내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안에 생겨나는 마음들’에 대해서, 그걸 모조리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번뇌 집착 망상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가의 명상 수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보려 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 안의 욕망의 발생과 형성과 작동의 양상들을, ‘외적 영역’에서 권력의 역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듯이 철저히 해부해 보려고 시도했던 게 아닐까.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철학은 <성의 역사>를 기점으로(정확히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뉘었을 지도 모르겠다. 
        
6

푸코의 장례식에서 들뢰즈가 낭송했다던 <쾌락의 활용> 서문이 나에게는 새롭게 변주되어 읽힌다. 현재의 나를 배반하고 전복하기 위한 책 읽기, 파괴되기 위한 책 읽기, 길을 잃기 위한 책 읽기, 방황하기 위한 책읽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 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심각한 문화 충격을 받았음을 시인해야겠다. 바타이유, 사르트르, 알튀세, 라캉, 레비스트로스, 보부아르, 블랑쇼, 바르트,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브로델, 메를로-퐁티, 부르디외 등 이름만으로도 압도감을 주는 지성들이 푸코와 함께 우정어린 논쟁을 하고 사상적 영향을 나누고 정치적 상황에 맞서 의기투합하기도 하면서 프랑스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더불어 대학에서 푸코가 강의했던 주제가 죽은 위인의 철학도 물 건너온 철학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독창적 이론이었다는 사실은 사유의 변방국에 사는 독자에게는 부러움을 넘어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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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 이매진 컨텍스트 29
정민우 지음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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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확히 나의 이야기이고, 오늘과 여기를 사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래서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어쩌란 말인가. 이 공허한 반문은 얼마간 회의와 무능, 무심과 체념에서 기인한 것일 게다. 좋은 책은 독자를 추궁하고 촉발하여 자신을 둘러싼 웅성거림을 만들어낸다. 이 책도 그런 책이고, 응당 그런 책이 되어야 할 테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만다. 질문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마련하지 못한 데 대한 불편함. 그런 불편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이 책이 겨냥한 바인지도... 석사논문을 다듬은 거라고. 대단하다. 응원을 보내며, 불편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해본다. 오늘-여기, 이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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