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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ㅣ 그린비 인물시리즈 he-story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 그린비 / 2012년 2월
평점 :
1
'자기 자신까지도 인식하는 인간'마저 대상화하여 재사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마치 서구 문명사가 수행하는 인류적 차원의 위빠사나 명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땅에 발 딛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푸코는 상아탑에 갇힌 명상가가 아니라, 행동하는 비폭력-아나키스트였다. 자유와 주체의 가능성들을 옥죄는 모든 규범과 권력에 대해 푸코는 단체를 조직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하면서 ‘행동’으로 저항했다. 그는 여러 정치적 현장에서 사르트르와 함께 있었고, 때로는 체포되기도 했으며, 자유의 나라 미국에 가서는 각종 마약을 섭렵하고 SM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가 결코 냉소적 회의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평생에 걸쳐 자유를 통제하는 모든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불복종함으로써 오늘의 세계와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그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2
“내 개인사 속에서도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 진정 배척되었다는 것, 사회의 그늘 속에 속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였다. 성 정체성이 바로 자기 문제일 때 그것은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과적 문제로 변모하는 것이다. 당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면 당신은 비정상이라는 의미고, 당신이 비정상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환자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 이론 작업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관련하여 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관여하는 제도들 속에,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균열, 미세한 진동, 기능장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푸코의 고백처럼, 그에게 ‘텍스트 밖에서의 삶’과 ‘텍스트’는 상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푸코를 냉소적 회의주의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피상적 독법이 낳은 속단일 것이다. 섣부른 낙인찍기일 것이다.
3
<광기의 역사>가 세상에 나왔을 무렵 데리다는 “선생님의 주제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뭐랄까 이성예찬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면서 푸코-데리다 논쟁의 포문을 연다. 요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주체를 세우기 위해 꿈과 오류는 회의의 대상으로 고려했지만 광기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그럼으로서 광기는 철저히 논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푸코의 해석이 “순진한” 독법이라는 것. 데리다는 “한 텍스트를 하나의 ‘역사적 구조’ 안에, 다시 말해서 ‘역사의 전체적 기획’ 안에 집어넣으려는 이러한 독서방법은 아주 위험한 것이며, 그 자체가 ‘합리주의와 양식에 대한’ 폭력”이라고, “구조주의적 전체주의는 여기서 고전주의 시대의 폭력적 감금과 비슷한 감금을 코기토에 대해서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일갈한다. 일견 사소하고 지엽적인 태클 같지만, 푸코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을 구성하는 상징적인 언표임을 감안할 때 이는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푸코가 최초로 보인 반응은 사뭇 감동적이다. 그는 데리다가 “아주 철저하게 핵심을 짚고, 정확하게 문제를 부각시켜 나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사유를 내게 열어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잠시 관대한 호인의 면모를 보여주던 푸코는 이내 변심하여 데리다가 고작 세 페이지 가지고 자신의 철학적 기획 전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한다. 그리고 정작 포커스를 두어야 할 지점은 담론적 실천이 수행되는 변형의 장 속에 코기토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인데, 들뢰즈가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적 흔적으로 환원해버림으로써 담론적 실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렸다고 힐난한다. 비단 데리다가 맞더라도 담론적 실천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일련의 사건들이지 철학적 텍스트가 아니라는 것.
4
“<지식의 고고학>에서 (...) 견해와 과학적 인식 사이에서 아주 특별한 층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앎의 층위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이 앎은 이론적 텍스트나 경험의 도구 안에서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천과 제도 안에서 실체화된다. 그러나 이 앎은 이 모든 실천이나 제도의 단순한 결과나 반쯤 의식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앎은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나타낸다. (...) 앎의 발전과 변화는 인과성의 복합적인 관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어떤 에피스테메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앎들이 제도적 실천의 단순한 결과도 아니고 의식적인 표현도 아니라면, 고유의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와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권력의 장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속성 역시 에피스테메에서의 앎들의 속성과 마찬가지 아닐까.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제도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메커니즘 속에서 자기 고유의 규칙을 정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기능,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푸코가 어떤 인터뷰에서 “자유가 없다면 권력 관계도 없다”고 했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권력은 상호작용이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개체도 비록 권력의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응당 자유로워야 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개인’을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양태’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타동적지만, 그래서 ‘부자유’하지만, 동시에 양태는 ‘자유롭게’ 변용된다. 실체의 속성을 분유하면서 무한하게 변용되는 것이다. 푸코의 개인들 역시 권력의 속성을 분유하며 자유로이 변용됨으로써 진리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라면, 에피스테메를 구성하는 앎이 자기 고유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듯이, 우리도 우리 고유의 변용의 규칙들을 옹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들이 돋아나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해낼 여력은 못 되고, 아직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푸코와 스피노자의 교직이 가능하리라는 예감이 든다는 것, 그리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내가 느꼈던 기분이 숨막힘과 답답함이 아니라, 충만과 기쁨이었다는 사실이다.
5
성의 역사는 원래 4편까지 기획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앎의 의지>,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 다음에 기독교 초기의 성 담론을 분석한 <육욕의 고백>이 있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현재 출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푸코는 자신이 작성한 ‘안내문’에서, <성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그러나 19세기 초 이전에는 없었던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이 서구 근대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오랜 침묵 끝에 말년의 푸코가 돌연 현세를 초탈하여 고대로 떠나버린 듯이 비치는 까닭은 아무래도 그의 불시의 죽음에서 기인한 착각일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근대 사회의 욕망하는 개인들을 해부하기 위해 그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 시대로 잡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욕망하는 개인’의 고고학-계보학적 탐사를 (비로소 막)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섹슈얼리티’는 ‘광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거시적인 조망, 총체적인 가늠을 위한 하나의 특징적인 지표이자 샘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푸코는 거시적으로 무엇을 조망하려 했을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쩌면 푸코는 주체에게 있어 ‘내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안에 생겨나는 마음들’에 대해서, 그걸 모조리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번뇌 집착 망상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가의 명상 수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보려 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 안의 욕망의 발생과 형성과 작동의 양상들을, ‘외적 영역’에서 권력의 역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듯이 철저히 해부해 보려고 시도했던 게 아닐까.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철학은 <성의 역사>를 기점으로(정확히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뉘었을 지도 모르겠다.
6
푸코의 장례식에서 들뢰즈가 낭송했다던 <쾌락의 활용> 서문이 나에게는 새롭게 변주되어 읽힌다. 현재의 나를 배반하고 전복하기 위한 책 읽기, 파괴되기 위한 책 읽기, 길을 잃기 위한 책 읽기, 방황하기 위한 책읽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 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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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심각한 문화 충격을 받았음을 시인해야겠다. 바타이유, 사르트르, 알튀세, 라캉, 레비스트로스, 보부아르, 블랑쇼, 바르트,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브로델, 메를로-퐁티, 부르디외 등 이름만으로도 압도감을 주는 지성들이 푸코와 함께 우정어린 논쟁을 하고 사상적 영향을 나누고 정치적 상황에 맞서 의기투합하기도 하면서 프랑스에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더불어 대학에서 푸코가 강의했던 주제가 죽은 위인의 철학도 물 건너온 철학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독창적 이론이었다는 사실은 사유의 변방국에 사는 독자에게는 부러움을 넘어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