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새롭게 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개운할까. 한 살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지난날에는 그 누구의 생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리셋, 그러니까 의식훈련을 통해서 머릿속에 누적된 과거를 자체적으로 소각해버리는 작업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의식의 표층 정도는 의지에 따라 재량껏 정돈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군가의 기억에 침투하여 거기 어떤 형태로든 잔존해 있을 내 과거의 모습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소망인 것이다. 탈퇴를 해도 게시판 작성 기록은 남아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때로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불쾌한지. 이 이상한 결벽은 뼛속까지 이기적인 성질의 것이어서,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고 다녔던 지난날의 행실에서 오는 스스로에 대한 굴욕감과 수치심에 비하면, 그동안 내 부덕의 소치로 인하여 타인이 입었을 피해와 상처에 대한 회환 따위는 일순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일에 걸쳐 옷가지를 비롯한 일체의 소지품들을 계획적으로 처분하고 휴지조각 하나 없는 텅 빈 방에서 목매단 채로 발견된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언젠가 신문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자살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그녀의 결벽 만큼은 이해가 간다. 목매달기 전 그녀에게 딱 한 가지 미련이 있었다면, 그것은 타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자신의 기억까지는 끝내 치우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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