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상류 주택의 내부 공간과 가구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19
최상헌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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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류 주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탐나는, 그래서 언젠가 꼭 흉내내보고 싶은 공간으로 사당과 사랑방을 꼽을 수 있겠다.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사당은,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내거나 명상수행을 하는 내향적 공간으로 혹은 저마다의 신께 기도드리는 영성적 공간으로 방 한 구석에 조그마한 자리를 마련해서 응용해볼 수 있겠다. 책 읽고 글 쓰고 때로는 친구 불러 차나 술 마시며 장기와 바둑을 두기도 했다던, “한 시대의 문화와 사회생활의 척도이자 주인의 교양과 안목, 지식, 가풍과 전통 그리고 재력을 보여주는 곳”이었던 사랑방도 거실에 흉물스런 텔레비전만 치우면 오늘날 얼마든지 복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페이지마다 주택 내부 모습과 갖가지 고가구들 사진이 두루 실려 있는데, 볼수록 참, 곱기도 하다. 어찌나 담백하고 정갈하고 기품이 있는지 요즘 유행이라는 북유럽 인테리어가 다 무어냐 싶다. 고가구야말로 가구 중에 가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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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심한 사도마조히스트들의 사랑이야기'라는 설정은 좋았는데 그걸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사이보그)가 한 수 위인 거 같다. <세크리터리>에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sm을 보여주는 거 같다. 낯설고 신기하고 특이한데 어쨌든 그들의 이야기인 거다. 영화를 보면서 '아, 나도 지금 저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sm에 동참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안 들거든. 근데 <사이보그>는 애초에 영화 자체가 그들의 시선, 그들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 그래서 울고 웃으며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되어 있는 거지. <사이보그>와 <세크리터리>의 차이는 마치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거랑 사파리차 타고 여행하는 거랑의 차이랄까. 난 개인적으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조마조히스트 커플의 본격적인 sm'을 다룬 이 영화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 <사이보그> 스타일로. (...)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을 좀 더 길게 잡아서 주인공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섬세하게 비춰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아니면 완전 <사이보그> 식으로 철저히 그들의 관점에서 이야길 풀어나가든가.
 

B: 난 <사이보그>보다 이 영화가 더 좋았는데. 난 <사이보그>가 더 타자적인 영화 같아. 난 사이보그 주인공들이 특이해 보였거든. 근데 이 영화 주인공은 특이해 보이지 않아. 난 등장인물이 특이해 보이면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실패한 거 같아.

 

A: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한테 정말 낯설고 특이한 대상이 있는데, 영화에서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면, 그건 다시 말해 그들을 우리의 방식으로 쉽게 절단하고 재단하고 난도질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프레임 속에 딱 맞춰서, 통조림처럼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랑 다를 바 없다고 봐.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이해해버리고,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에 대해 쉽게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한 건 굉장히 나이브한 방식인 거다. 불편함과 낯섦, 그로 인한 고통의 과정이 없는 타자 이해는 기만이 아닐까. <사이보그>가 좋았던 건 그 영화가 철저히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해나감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당혹감과 낯섦을 체험케 하면서도 그것이 단절감이나 불안, 공포, 거부로 이어지지 않고 즐거움, 유쾌함, 함께 어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관객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박찬욱 식 태도를 굉장히 존경하고 지지해.

 

B: 난 그 영화 보고나서 별로 유쾌하거나 어울려보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통조림화는 박찬욱 쪽이 더 심하고 노골적이었던 거 같아. 감독은 마치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난 그 영화 보고 나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에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었어. 난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영화를 볼 당시 (사회로부터) 매우 특이한 아이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불쾌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A: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sm에 심취한 사람이 <세크리터리>를 봤다면 그 사람한테는 <세크리터리>가 굉장히 불편한 영화일 수 있지 않을까.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 나빴던 거처럼.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세크리터리>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사이보그>는 특이한 애들을 특이한 애들의 프레임으로, 특이한 애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낯설게 보이는 거지. 하지만 <세크리터리>는 특이한 애들을 우리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안 특이해 보이는 거고.

 

B: 난 그 특이하다는 표현 자체가 뭐랄까. 소외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A: 나도 특이하다는 표현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할 표현이라고 보지만,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의 현재 정치적 위치나 수용의 한계, 인식의 마지노선 등을 적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자신이 언제 어디에 어떤 곳에 그 단어를 쓰는지를 의식하면서) 써볼 만한 단어라고 본다. 그런데 너님한테 <사이보그>가 불쾌했던 건 너님은 <사이보그> 주인공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는데 감독이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뭔가 희화화시키는 거 같았다는 뜻이니?

 

B: 아니.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감독 입장도 전혀 이해가 안 되었어. 나는 사이보그가 기분 나빴어.

 

A: 나는 사이보그 완전 좋았는데 ㅜ.ㅜ 박찬욱 감독 영화 중 쵝오라고 생각했는데. ㅜ,ㅜ (그런데 너님은 <사이보그>가 더 통조림 같다고 했지?) 그렇다면 넌 사이보그에서 임수정 캐릭터가 더 통조림 같다는 거니? 나는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이 더 통조림 같은데. 더 전형적이고.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형화된 캐릭터잖아.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게 치유가 안 되서 자기 스스로를 해하는 그런 전형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잖아.

 

B: 캐릭터 자체로는 통조림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도 중요하지 않을까.

 

A: 그렇다면 감독의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세크리터리>가 더 철저히 타자적이었다고 생각해. 감독은 별로 노력하지 않았어. 자기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내면에 좀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어. 특히 변호사의 내면에 대해서.

 

B: 음. 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반대로 느꼈는데...ㅠ_ㅠ

 

A: 이해하는 척만 하고... 차라리 그렇게 나이브한 태도로 이해할 거면 아예 이해하려는 기만적 제스처 자체를 거두고 철저히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던지. 이해라는 단어도 사실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말하고 비슷하게 관점주의적인 단어인 거 같아. 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 누가 누구를 감히? 내가 보기에 <세크리터리>는 어설프게라도 이해하려는 스타일(그러나 나는 이런 거 자체가 그야말로 어설픈 기만인 거 같아.)이고 사이보그는 아예 이해하려고 안 하는 스타일, 아니 이해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스타일인 거 같아.

 

B: 나는 좀 달리 생각하는 게 이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 같아. 정치적으로 극우적인 태도랄까. 난 우리가 서로 다르기보다는, 닮거나 비슷한 점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고, 영화도 그런 면을 강조하는 영화를 선호해. (예를 들어) 왜 내가 너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지? 물론 내가 너님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했다고 한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 자체는 기만이 아니지.

 

A: 그것은 기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자신의 정의로운 태도 자체에 쉽게 자기만족 하는 거는 기만이겠지. 그런데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어쩌면 너님이 그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때문 아닐까. 나는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그런 타성을 지적해주는 영화, 그런 타성으로부터 관객들을 구출해주는 영화가 좋아. 나는 <세크리터리>처럼 낯선 걸 친숙하게 보여주는 영화보다는, <사이보그>처럼 낯선 걸 낯설게 보여주는 영화가 더 좋아. 낯선 걸 낯선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당혹과 불편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해주는 영화. 관객들로 하여금 좀 더 스스로 적극적으로 운동하게 해주는 영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계를 낯설게 보도록 해주는 영화가 좋아.

 

B: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우리가 충분히 낯선 걸 낯설게 보고 있다고 생각해. 난 우리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생각하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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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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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송논쟁 당시 서인들의 발언을 꼭 왕권을 위협하는 권력욕의 표현으로만 볼 것인가. 최대한 선의를 가지고 발언에 담긴 진정성을 참작해서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노회한 정치꾼이 아니라, 이념에 단단히 매몰된 근본주의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인용된 그들의 주장에서는 종교나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있는 자들만이 보여주는 특유의 배타성과 극단적 결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논쟁에 가담한 인물들 가운데는 권력의 향방에 따라 표변하는 인간에서부터 원칙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 철저히 도그마에 사로잡힌 인간까지 온갖 부류들이 다 있었을 테고, 각각의 정치적 태도의 저의를 밝히기란 참으로 모호한 일인 만큼 논쟁의 성격 역시 해석이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 여러 왕들이 갖가지 정황 속에서 비명횡사했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소현세자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오백 년 왕실의 역사에서 그의 죽음은, 조선 후기의 국운이 좌우되는 운명적 기점 같은 것이 아니었나. 아, 소현세자야말로 조선 역사에 갈림길을 만들어낼 인물이었는데. 하나의 숨막히는 가능성이었는데.

 

3 이 책은 독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왕의 죽음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배경에 무게를 싣고 있는 책이다. 픽션도 아닌데 굳이 제목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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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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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유기체적으로 보는 관점이 흘러간 유행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역사는 마치 생물체의 한살이처럼 와닿는다. 조선의 성쇠에 비추어보면 광복 반세기를 넘긴 대한민국은 이제 갓 신생국의 티를 벗은 상태라고 봐야겠다. 정치 전반을 주도하는 우파 세력이 보여주는 철학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미비하게 느껴지는 점이 그렇고, 정국에 영향을 미치는 자생적인 사상의 흐름이랄 만한 것이 부재하다는 점이 그렇고, 사회 변동이 가라앉으며 계급 구조가 점차 견고해져가는 상황도 그렇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사건들 하며, 당대의 인물과 오늘의 인물들은 또 얼마나 닮아있는지...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 것인가.

이 책을 덮고 나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였으며, "그 세계 속에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미처 그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 문명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저자의 지적에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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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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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인간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 모든 원인을 제거하고 자신들을 구원해줄 외부적 개입자로서 ‘신’이라는 표상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교 인간들은 필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낸 이 ‘신’이라는 표상에 의해 짓눌리기 시작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과 모든 면에서 그렇지 못한 자신을 비교하게 되면서 자신의 본질이 왜소하고 비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을 죽여버린다. “신의 표상이 없어지면 신의 명령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그리고 신의 손에 있는 인간의 오점으로서의 ‘죄’의 감정도 없어진다.”

 

구원을 통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제거하여 구원의 서사 구조 자체를 붕괴시켜버림으로써 해방될 것. 니체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신은, 함부로 죽여 버리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용한 존재가 아닐까. 신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굴욕과 죄책감, 공포와 불안과 비루함의 감정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신이라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안정감과 충만감을 주고, 자극적 흥분과 희열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적 측면에서 신은 마치 어른거리기는 기미를 느끼기는 하지만 도저히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대상 a 같고, 도둑맞은 편지 같고, 마력적인 요부 같다. 관계를 끊을래야 끊어버릴 수 없는 애증의, 미지의 대상.

 

사랑이 다른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는 까닭이 그것의 이타적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휘하는 효용과 유익성에 있다는 니체 자신의 논리대로, 신 역시 그 본질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만족감과 쾌감을 주기 때문에 신을 폐기하는 문제는 재고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감이 과도할 때 인간은 신에 짓눌려 신경쇠약이 되어버리고 또 그러한 신경쇠약에 대항하려는 수단으로서 자기를 학대하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적 인간이 되어버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을 없애버리면 아마도 인간은 따분하고 권태로워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혹은 기준점을 상실함으로써 또 다른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이다.

 

신은 폐기될 수 없다. 신이 우리에게 안락한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에. 또 신이 우리를 고무시키고 황홀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그뿐일까.

 

니체는 형이상학적 예감 혹은 직관이라는 것은 단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적 바람일 뿐, 그 자체가 형이상학적 진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리고서는 진리의 출생지를 표방하는 철학을 위시한 모든 학문들을 망치로 깨부수려 했지만, 그럼에도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 인식했던 철학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니체 자신이야말로 또 다른 형이상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니체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두려움과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장 높은 산맥으로 위험한 길을 오르”다가 추락해버린 자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그는, 그 자신이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과 너무도 닮아있다.

 

부정은 언제나 우리를 쉽게 피로하게 만든다. 부정은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산출해내지 못한다. 부정은 대개 겉으로는 파괴하는 척 하면서 실은 부정의 대상과 공모한다. 신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신이 아닌 '신성'을 탐구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니체는 이마저도 의심하고 경계한다. 이 책 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성마저도 은근히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살아가는 날이 다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깊이 있게, 장기적으로, 인식의 노력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는 니체가 아닌 다른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편이 낫겠다. 니체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뭔가 불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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